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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똥가리 Sep 19. 2021

커피 한잔 할래?

야행성 인간의 커피

나는 지독한 야행성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곧장 몸을 움직이긴 한다. 

문제는 몸은 움직이고 있지만 머리는 두어 시간 넘게 멍하니 버티려 하는 유전자가 있다.

야행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을 깨우려 곧장 양치와 세수부터 하는 습성도 생겼다. 


내가 야행성이 된 것은 유아기 생활 습관의 환경적 결과다. 

외갓집에서 자라난 나에게 일상의 규칙이랄 것이 없었다.

외할머니가 밭일을 하러 가시기 전, 샛별 보기 운동을 하듯 밥상에 앉아서 졸았다.

입에 넣어주는 음식은 턱이 알아서 씹어줬다.

그러고 나면 또 자야 했고 일어나면 늦은 시각.

농사꾼의 아침이니 시간이 몇 시였을지......


야행성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불빛이 없어 어둡다 못해 암흑이 되는 시골의 밤. 

멀뚱멀뚱 별은 어찌나 반짝이던지.

10살 터울의 막내 이모가 복숭아 서리에 나를 끌고 갔을 때도 망을 보는 대신 하늘만 봤다. 

밤은 나에게 그런 시간이었다. 

가장 말똥말똥할 수 있는 시간. 

빛나는 시간.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담당 피디들이 힘들었을 것이다.

아침에 겨우 나오는 데다 어쩔 수 없이 나와도 내 상태가 저세상급이다.

나의 실용성은 회의에서 결론을 빨리빨리 잘 내리는 편이라는 점인데 아침이면 불량 작가가 된다. 

해서 회의가 길어진다. 


애니메이션 '주토피아'에 나오는 나무늘보를 보면서 

아침의 내 모습 같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양심의 지각적 판단이다.

그래서 회의는 늘 오후였다. 코로나가 끝나고 만나게 된다면 한 번은 사과를 해야 할 거 같다.

친구들도 힘들어하긴 마찬가지. 주변엔 아침형들이 많다. 


나도 사실 아침이라는 것을 가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모두가 아는 늦잠쟁이라 주변인들 듣는 곳에서 감히 입에 꺼낸 적이 없는 고백이다. 

친한 피디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하는 동안 나의 건강을 걱정한 적이 있다.

"그러다 심장마비 온다카든데....."

걱정이 맞을 것이다. 


나는 늘 늦은 밤에 생각과 치열하게 다툰다.

꿈을 꾸지 않고 자본 적도 없다. 

뼛속까지 야행성인 이유. 잡념과 공상이 지나치게 많은 유형.


밤엔 제발 생각 따윈 하고 싶지 않은데, 그 생각으로 또 밤을 새운다. 

야행성 인간의 고통. 

많이 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일어나는 시간이 거시기할 뿐.


나는 커피 중독자다. 


해서 나는 무엇이든 커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한 모금이라도 마셔야 사람의 눈빛이 된다.

우아한 이유로 커피를 찾는 게 아니다. 

늦은 하루를 시작하는 게 자랑은 아니지만 

급한 것도 체질에 맞지 않아서 일과 시작 전 커피를 꼭 마셔야 한다.

그것도 "쉬어갈래 커피"를 마신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아주 훌륭한 명언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하루 중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커피 한잔 할래?"라고 말하는 것은 

"할 말이 있어."라기보다 굳이 말하자면 "같이 쉴래?"와 같다. 

늦은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그건 나의 행복이다.


나에게 

"커피 참 맛있다"는 "아 참 편안하다"

"커피 한 잔 더"는 "지금 참 좋다" 

"커피 한잘 할래?"는 "나랑 같이 쉴래?" 


단점이 참 많지만 뭐 어때? 


"커피 한잔 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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