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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음 Sep 12. 2021

세상에 홀로 버려진 기분이 들때.

-플로랜스 프라이스를 만난다.

 친구 A에게 친구 B의 출산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한때 이들과 정기적으로 모임을 했던 사이라는 게 점점 아득해진다. 요즘은 초저출산 시대라던데 어찌 된 것이 나의 지인들은 두 명은 기본이고 애가 넷인 집도 있다. 학창 시절을 같이 보내고 졸업을 하고도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며 친목을 다져왔던 우리들이었는데 이제는 서로의 소식을 건너들어야 한다.     


  우리 모임의 시작은 단순했다. 친한 애들 둘둘이 합치다 보니 넷이 되었다. 그러다 각자 남자 친구들을 모임에 데리고 오기 시작하더니 그들이 부부가 되어 우리 모임에 합세했다. 내가 내 인생의 사랑이 아닌 것 같다며 사람을 떠나보낼 때 그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나는 부부들 모임에 낀 유일한 미혼녀가 되었다.     


  낯짝이 두꺼운 건 지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하는 건지 부부동반 아이 동반인 모임에서도 나는 한동안 어색함 없이 잘 섞여 놀았다. 그 당시엔 부부들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밌고 출산 육아 이야기 모두가 그때는 참 신기했다. 이제 갓 사회로 나온 20대에게 육아, 출산, 시부모님과 갈등 등의 이야기는 재밌는 우화집을 읽는 느낌 일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를 제외한 만남이 잦아졌다. 키즈카페 모임이 그랬고 부부 동반 여행이 그랬다.      


 친구들은 가정이 우선순위가 됐고 나는 내 인생이 우선순위가 됐다. 내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없는 모임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왔다. 나도 그들도 서로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없어진 것이다.  

   

 그 이후로도 나는 종종 그룹에서 떨어져 나오는 경험을 했다. 내가 떠나오기도 했고 사람들이 떠나가기도 했다. 다들 맞다고 하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나는 너무 좋은데 다른 사람들은 보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그냥 상황이 그런 것이다. 이 시대엔 다른 것이 경쟁력이다. 그렇게 나 자신을 달래 봐도 가끔은 장미 밭에 잘못 떨어진 작은 잡초가 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누구나 한 번쯤 울타리를 떠나야 할 시기가 온다.          


 다수의 무리 가운데 홀로인 느낌이 들 땐 나보다 더 외로운 사투를 한 선지자를 찾아보는 게 도움이 된다. 여러분은 흑인 여성이 작곡한 클래식 음악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클래식 음악 역사에서 여성 작곡가에 대한 기록은 찾기가 힘들다. 그런데 흑인 여성 작곡가라니. 플로랜스 프라이스의 존재는 음악가의 전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생경한 존재였고 그녀의 음악 또한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이런 음악을 작곡하는 흑인 여성이 있다니. 역시, 뭐든 꾸준하고도 자세히 보아야 보이고 들리는 것이 세상 이치이다.     


 프라이스는 1887년 미국 아칸소주 리를 록에서 태어났다. 프라이스의 음악세계를 이해하려면 당시 미국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프라이스가 태어난 시기는 남부 재건 [미국 연방정부가 미국의 수정헌법(흑인의 참정권, 시민권, 인권법 등)이 잘 지키지는 지 확인을 하기 위해 중앙정부에서 연방군을 남부에 파견한 시기]이 끝난 지 10년 후로 미국 연방군이 남부에서 철수하고 일부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다시 힘을 얻어 흑백 갈등이 고조되는 시기였다.      


 하지만 프라이스의 부모는 고학력자의 특권층으로 지역사회에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프라이스의 아버지 제임스 스미스는 치과 의사였고 어머니는 교사였는데 어머니 걸리버는 어린 플로랜스에게 피아노를 직접 사사할 정도로 피아노 연주 실력이 훌륭했다. 플로랜스는 이런 부모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음악 공부도 어린 나이에 시작하여 11살엔 개인 독주회를 여는 성과를 낸다.     


 그녀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여 보스턴에 있는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에 입학한다. 흑인 중산층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분위기였던 고향 리틀록과 달리 보스턴은 플로랜스에게 낯선 도시였고 학창 시절엔 자신이 멕시칸계라고 말하며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녀는 학업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유명 변호사인 토마스와 결혼을 한다. 그렇게 그 시대에 다수의 흑인이 겪던 차별의 세상과 다른 분위기의 안락한 삶을 살던 그녀에게도 급작스러운 위기가 찾아온다.     


 그녀의 평탄한 삶에 큰 위기가 찾아온 건 리를 록에 흑백 갈등이 심각하게 발전하기 시작한 1919년부터이다. 알칸소 주 공무원들은 흑인 소작농들과 백인 농장주 사이의 갈등을 중재시키지는 못할망정 더 악화시켰는데 그 시발점은 흑인 노동조합에 찾아가 총을 쏜 것이었다. 이 사건에서 백인 한 명이 사망하였고 이는 수많은 백인의 분노를 사게 했다. 이 이후로 흑인들을 향한 백인들의 린치는 점점 심해졌고 수십 명의 흑인들이 사망하기에 이른다.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흑인들을 향한 무차별적 린치에 불안함을 느끼던 플로랜스는 결국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제임스 로렌스-흑인들의 이주 연작 중 1번


새로운 곳에서 뿌리를 내리는 일.      

    

 미국 남부에서는 1920년부터 흑인 린치가 특히 심해져 매년 50명에서 100명 사이의 흑인이 처형당했다. 살기 위해 남부를 떠나 북부로 이동하는 흑인들의 수는 매년 증가 추세였고 이들 사이에 플로랜스의 가족이 있었다.     


 고향을 떠난 플로랜스의 삶이 마냥 평탄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 닥친 경제위기로 가정경제가 어려워지자 플로랜스의 남편은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플로랜스는 1931년 공식적으로 이혼한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중산층의 삶을 살아온 플로랜스로서는 가난이 낯설었을 것이다.      


  경제개념이 없던 플로랜스는 주변 지인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이 일은 그녀를 탈바꿈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플로랜스는 연주자로서든 작곡가로서든 일이 들어오는 대로 열심히 하였고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그녀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향에서는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던 반면 시카고로 이주 후에는 그녀의 작곡 능력이 빛을 바라기 시작했다. 작곡 콩쿠르에 꾸준히 작품을 냈던 플로랜스는 입상을 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 갔고 그녀의 음악을 인상 깊게 들은 지휘자가 생기면서 후원자들을 얻었다. 그녀가 작곡한 곡들은 미국 내에서 점점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그녀가 편곡한 가곡과 흑인 영가는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플로랜스는 음악계에서 자신의 입지가 커지자 흑인 음악가들을 위한 활동을 활발히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성이며 흑인인 자신의 뿌리를 음악에 녹여내는 시도를 했고 이는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게 했다.     


 플로랜스가 미국뿐 아니라 유럽의 음악계에서도 인지도를 쌓자 고향 리를 록에서도 그녀의 인기가 높아졌다. 리를 록의 유명인사들이 그녀를 초청하여 그녀의 곡을 듣기 원했으나 그녀는 처음에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남부에서 직접 보았던 흑인을 향한 잔인한 차별의 역사를 잊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요청에 그녀는 고향으로 잠시 돌아와 연주회를 열었고 대성공을 거뒀다.     


 그녀의 음악은 흑인 영가에 뿌리를 두면서도 우아하고 세련된 표현방식을 고수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녀는 제2의 고향인 시카고에서 운명하였고 살아생전엔 흑백차별이 심한 남부 실정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자주 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피아노 협주곡과 미시시피 모음곡엔 그녀 고향의 향취가 넘쳐난다. 그녀의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역시 인간의 뿌리는 장소나 환경에 의해서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닌가 보다.      




 사람도 분갈이가 필요하다.          


  선물 받은 몬스테라가 자꾸 드러누워서 사진을 찍어 선물을 준 사람에게 보냈더니 분갈이를 해주라는 답변을 받았다. 식물에 관심이 없던 나로서는 참으로 귀찮은 일이었지만 그냥 두면 곧 죽을 것 같아 서툰 솜씨로 분갈이를 해줬다. 몇 달 후 한 그루였던 몬스테라는 가지치기를 해야 할 정도로 무성하게 자랐고 나는 이제 분갈이의 장인이 되었다.     


 자신과 의견이 안 맞거나 상황이 안 맞는다고 해서 무조건 자리를 박차고 나오면 어느 순간 정말 혼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기다려도 보고 참아도 보고 여기저기 조언을 구해봐도 방도가 없다면 그땐 뿌리내릴 곳을 바꿔야 할 시기가 온 게 아닐까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왠지 홀로 버려진 기분이 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 필요가 없다. 사람도 그저 주기적으로 분갈이가 필요한 것일 뿐이다. 어떤 이는 그 시기가 자주 오고 어떤 이는 평생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도 한다. 식물도 분갈이 시기가 제각각인데 사람은 오죽하랴.     


 나의 뿌리를 옮긴다고 해서 내 뿌리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는 일도 고되고 힘든 일이지만 마음의 뿌리가 다 썩어서 회생 불가 상태가 되는 것보다 뿌리내릴 자리를 옮겨보는 것이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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