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브, 코펠리아 왈츠.
“플루트가 재밌어요?”
“.... 아뇨.”
“그럼 엄마가 억지로 시킨 거예요?”
“.... 아뇨.”
“그럼 음악은 좋아해요?”
“... 아뇨.”
“그럼... 나한테 레슨은 왜 받는 거야?”
“.... 그냥요.”
“... 아... 그렇구나..”
이 세상에 궁금한 게 천지인 선생님과 이 세상에 궁금한 게 하나도 없는 학생은 오늘도 입씨름을 한다. 딱히 좋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누가 시키는 일도 아닌데 이 아이는 나에게 왜 오는 것일까가 매우 궁금해진 지 꽤 되었다. 재밌는 사실은 이런 친구가 매년 한 명씩은 꼭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는 학생이 매년 한 명씩은 내게 오는데 나는 아직도 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서 문제인 아이였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은 아이를 맡겨놓을 때가 없었고 나는 학원을 5~6개씩 돌아야 했다. 새벽 수영을 시작으로 해서 영어, 수학은 기본이고 악필 교정을 위한 서예까지 마치고 나면 항상 어두운 밤이었다. 그중에서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나는 즐거웠다. 수학문제지에는 비가 내리고 악필을 고쳐질 기미가 안 보이는데도 마냥 해맑았다.
마냥 해맑은 아이는 또래보다도 정신연령이 한참 낮았고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도 인형을 사달라고 조르는 지경까지 갔다. 어렸을 때 한창 가지고 놀다 질려서 다 갔다 버린 인형을 곧 중학생이 될 아이가 왜 갖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건 꼭 해야 했고 가지고 싶은 건 무슨 수를 내서라도 얻고 봐야 했다. 팔짱을 끼고 기가 차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엄마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내 배에서 어쩌다 저런 애가 나왔을까. 딱 그 표정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할 것인가. 잘하는 것을 할 것인가.라는 기로에 설 때면 나는 언제나 고민 없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했다.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어서도 그랬지만 익숙한 걸 하는 것보다 흥미가 생기는 일을 찾는 것이 나에겐 더 기쁨이 되어서였다. 이 일이 나에겐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확신에 여러 가지 일에 도전했다. 하지만 도전하는 것을 즐기다 보니 이것저것 경험은 많이 했으나 뭐하나 얻은 건 없는 그런 어른이 되었다. 딱히 대단한 게 없는 어른이 되어놓고도 나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너는 좋아하는 게 뭐니? 꿈이 뭐야?
좋고 싫음이 문제 되지 않는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초창기에는 모든 것에 의욕 없는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말썽을 피우거나 연주를 잘못하는 것은 나의 도전정신을 불 지피는 장작이 될 뿐 정신적으로 힘들지는 안았다. 그런데 아니요. 싫어요. 그냥요. 이 세 가지로 모든 질문을 돌려막기 하는 아이들을 만나면 내 영혼이 별나라로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하는 거야?”
“하기 싫음 하지 마!!”
참다 참다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금세 벽에다 머리를 쥐어박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친 지 10년이 훌쩍 넘고 보니 하기 싫고 재미도 없고 그냥 하는데 꾸준히 레슨을 받는 아이들이 있고 질문도 많고 악기 연주하는 것이 재밌고 나중에 커서 훌륭한 연주자가 되겠다던 아이가 갑자기 그만둬버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좋아서 하는데 성과가 나쁠 수도 있고 싫어하는 일이지만 재능이 있는 경우도 있다. 좋아하는 일에 재능이 있고 그 일로 높은 성과를 얻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흥미와 재능 그리고 성과 이 세 박자가 딱딱딱 맞아 들어가면 참 좋겠다마는 그게 쉽지 않다.
이 세상 한편에는 딱히 좋아하지 않는 일에서도 큰 성과를 얻는 사람이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가끔 허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재능이 없어도 좋은 걸 해야 하는 사람인 것을. 좋은 걸 해야 하는 사람 반대편에는 하기 싫은 걸 해도 성과를 얻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이 세상에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는 아이도 이해해보자는 마음이 든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좋고 싫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강약약... 심호흡을 하고 힘을 빼는 시간.
머리로는 정리가 되었고. 의욕이 없고 하기 싫은 상태에서도 성과를 얻는 사람이 있다는 걸 무수한 경험을 통해 습득했지만 그들과 성향이 다른 나로서는 여전히 힘들다. 가끔 가슴에 불이 나서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다행히 이럴 때는 잠깐의 심호흡이 필요하다는 걸 알 정도의 연차가 되었다.
타인의 생각이 이해가 안 되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답답함이 밀려올 때는 하나 둘 셋둘둘셋. 왈츠가 제격이다. 왈츠는 3/4박자의 춤으로 19세기 유럽 전역에서 대유행했던 춤이다. 이 춤이 당시에 얼마나 인기가 높았는지는 클래식에 왈츠 형식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 보면 알 것이다. 왈츠는 대개 저녁에 열리는 파티나 결혼식 등 특별한 행사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많이 애용되었는데 특히,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는 자리에서의 필수적인 요소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상상해보라. 화려한 의복을 입은 남녀가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템포의 왈츠를 추며 서로를 탐색하는 장면을 말이다. 그래서인지 왈츠를 듣고 있으면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오롯이 전하는 듯한 기분 좋은 떨림이 전해진다. 물론 모든 왈츠 음악이 사교 현장에서만 쓰인 것은 아니다. 만약 박자가 수시로 바뀌는 쇼팽의 왈츠가 사교 현장에서 춤곡으로 쓰였다면 수많은 남녀가 서로의 발을 밟고 사과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음악에서 왈츠는 춤곡의 형식을 빌려 새롭게 탄생한다. 그래서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그림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왈츠의 전형인 강약약의 셈여림이 너무 두드러져서 그 곡이 그 곡 같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겐 발레 음악에 나오는 왈츠를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프랑스 마지막 낭만 발레라고 불리는 발레 코펠리아에는 헝가리 전통 무용 차르다시, 에스파냐의 춤곡 볼레로, 바로크 시대의 춤곡 기가 등 여러 가지 춤곡이 등장한다. 여러 가지 춤곡 속에서 시간의 왈츠는 들리브 특유의 서정성과 극적인 전개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나를 내려놓는 박자.
강약약. 강약약. 이렇게 환상적인 분위기 안에서 반복되는 셈여림에 마음을 맞추다 보면 어느새 요람 속에 갓난아이가 되어 마음에서 솟구쳤던 불꽃이 사그라든다. 화를 내려놓고 타인이 이해가 안 가는 순간을 복기해보면 대부분 나의 시각에서 바라봐서인 경우가 많다.
좋아하지도 않은 데 왜 하는 거야? 재능이 많은데 왜 더 열심히 안 하는 거야? 조금만 더 열정을 가지면 충분히 발전할 수 있는데 왜 저렇게 의욕이 없지? 내가 저 나이에 저 정도 할 수 있었다면...
역시 내 기준들로 가득하다. 어차피 타인을 오롯이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생각해보라. 얼마 전까지는 90년 대생들이 온다고 하더니 이제는 MZ세대를 이해해야 한다고 난리다.
우리가 타인을 궁금해하고 이해 못하겠는 이유는 결국 자신의 시각에서 타인을 바라보는 데 있는 게 아닐까? 타인을 이해하는 첫걸음은 내 기준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아닌가 싶다. 하나 둘 셋. 둘둘셋. 나는 오늘도 이 세상에 재밌는 것이 하나도 없는 학생 앞에서 나를 내려놓는 박자를 센다. 이 길이 타인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되길 기도해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