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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음 Oct 01. 2021

자해 같은 사랑 앞에 선 사람들에게.

-차이코프스키, 현을 위한 세레나데 


 얼마 전에 요상한 프로그램을 하나 봤다. 정확히는 3분 정도 되는 프로그램 소개 유튜브 영상을 여러 개 엮어봤다. 맨 처음에 이 프로그램의 영상을 이렇게 많이 보게 될 거라라고 생각 못했었는데 콘셉트 자체가 이해가 안돼서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하며 찾아보다 보니 10개가 넘는 영상을 본 후였다.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환승 연애’이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이 프로그램은 예전에 사귀었던 옛 연인 앞에서 딴 연인을 찾는다는 콘셉트를 가진 프로그램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한번 깨진 그릇은 아무리 좋은 접착제를 써서 붙여도 깨진 그릇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런 프로그램을 만드는 저의가 무엇인지 참 궁금했다. 나도 이제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프로그램의 소개를 살펴본다.      



 “다양한 이유로 이별한 커플들이 모여 지나간 사랑을 되짚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나가는 연애 리얼리티”  

   


 어떻게 보면 온고지신의 마음으로 새로운 사랑을 찾아보자는 자기 계발형 사랑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이야기가 자해처럼 보이는 것일까. 옛 연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고 뒤돌아 우는 남성 출연자의 모습을 봐서 인건 지 지나간 사람과 새로운 사람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댓글을 봐서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참 불편하다.     


 나는 어렸을 때 이 세상의 최고 가치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고 발전시킬 수 있으며 구원할 수 있다고 그렇게 굳게 믿었다. 이런 믿음은 사랑이 판타지 화가 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실망이 난무하는 연애사로 이어졌다. 진정한 사랑은 헌신, 신뢰, 희생, 존중, 책임감 등이 필요하며 사랑의 길이 고통스러울 만큼 험난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던 나로서는 참으로 당황스러운 날들이었다.     


 사랑 하나면 모든 지 해결된다는 식의 무지를 안고 여기저기 부딪치며 사랑에 세게 데인 나와 달리 요즘 젊은 세대들은 지나칠 정도로 현명하다. 내 한 몸 챙기기도 버거운데 사랑 때문에 힘들고 싶지 않고 괴롭고 싶지 않으며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남의 사랑은 자극적이되 나의 사랑은 어렵지 않고 쉬웠으면 좋겠고 즐거웠으면 좋겠다. 사랑을 대하는 태도가 참으로 냉소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사는 우리는 왜 아직도 끊임없이 사랑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사랑의 모양은 어떤 모양일까.          



  다른 사람의 연애 이야기를 들으며 설레고 화내고 공감했던 경험이 있던 사람이라면 나는 그 사람에게 음악가의 연애사를 절대 보지 말라고 할 것이다. 예민하고 섬세하며 인간뿐 아니라 때로는 사물에게까지 공감하는 능력을 보이는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심장에 무리가 올 정도로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 입에 더 많이 회자되지만 말이다.     


 음악가들의 사랑이야기 중에 가장 미스터리 하며 자극적인 이야기를 꼽자고 하면 차이코프스키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의 사랑 이야기엔 집착, 연민, 불안, 질투 등 아침드라마보다 더한 소재가 등장하고 동성애와 플라토닉 러브라는 양극의 사랑 형태가 주제를 이룬다.     


 차이코프스키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그가 젊은 시절에 수많은 연서를 받은 이유가 짐작이 갈 것이다. 실제로 그는 많은 여성의 흠모의 대상이었지만 정작 그는 여성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의 동성애적 성향이 언제쯤부터 발현됐는지는 그의 생애를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르지만 확실한 건 그가 자신의 성향을 철저히 숨기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각각 다른 여성과 한 번의 약혼과 결혼을 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약혼자는 아르토라는 이름의 성악가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매료된 차이코프스키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을 약속하지만 당시 유명한 성악가였던 아르토가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공연해야 한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차이코프스키의 지인들은 그들의 결혼을 반대한다. 가족도 아니고 지인들의 조언에 마음이 흔들리는 게 말이 되냐 싶지만 차이코프스키는 주변 친구들과 지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도움을 받아왔기에 그들의 반대에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약혼이 비극으로 끝난 결정적인 이유는 차이코프스키가 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순간 아르토는 같은 극단에 있던 바리톤 가수에게 빠져 속전속결로 결혼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아르토와 사랑의 아픔이 다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차이코프스키의 우울증이 병적으로 심해졌고 그가 그렇게 숨기고 싶어 하던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그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이는 차이코프스키가 결혼에 대해 강박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나는 결혼하기로 했다. 피할 수 없다. 결혼을 해야 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모두를 위해서이다.”          



 비장하기까지 한 그의 결심은 그의 인생의 최대 비극을 낳게 되는데 그건 그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한 여인과 결혼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안토니나로 차이코프스키가 근무하던 모스크바 음악원 학생이었다. 그녀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연서를 보내며 자신의 열렬한 사랑을 여러 번 고백했고 차이코프스키는 결혼해야 한다는 강박과 체념의 중간에서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차이코프스키와 안토니나의 결혼생활은 너무 빠르게 무너졌다. 육체적인 관계를 원하지 않던 차이코프스키와 달리 안토니나는 차이코프스키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 했고 그에게 집착했다. 결혼한 지 3달도 안되어서 차이코프스키는 그녀에게서 도망쳐 나왔고 안토니나는 평생 그를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혔다. 이혼을 원하던 차이코프스키에게 이혼을 해줄 것 같이 하다가도 편지로 협박을 하는 등 정신적인 학대를 그에게 지속적으로 가한 것이다. 여린 차이코프스키는 3개월도 안 되는 결혼 생활로 인해 정신이 쇄약 해졌고 동시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죄책감으로 그녀에게 경제적 자원을 보냈다. 이 사랑의 최대 비극은 3개월도 안 되는 결혼 생활로 인해 양쪽 다 정신병을 얻었다는 것이다. 안토니나 역시 차이코프스키처럼 정신적인 불안 상태를 지속하다 병으로까지 발전하였고 생의 마지막을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한편,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에게 한 줄기 빛 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폰 메크 여사였다. 폰 메크 여사는 부유한 미망인으로 당대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그들에 받은 예술작품들을 보고 들으며 소소한 기쁨을 얻는 사람이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안토니나를 만나기 전부터 폰 메크 여사와의 인연이 있었다. 폰 메크 여사가 차이코프스키의 재능을 높이 사 그에게 곡을 의뢰했던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안토니나를 피하기 위해 오랜 도망 생활을 했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런 시기에 폰 메크 여사는 그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13년 이상 지속하였고 그에게 매일 편지를 보내며 그를 응원했다.      


 차이코프스키와 폰 메크 여사의 관계가 재밌는 것은 이들이 평생 직접적인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폰 메크 여사가 1년에 한두 번씩 피렌체나 파리 등 여행지나 개인 소유지에 차이코프스키를 초대하여 그녀 곁에 둔적은 있었지만 그녀는 그를 멀리서 봐라만 봤을 뿐 만남을 가지진 않았다. 사랑이 듬뿍 담긴 연서를 보내는 상대를 가까이 불러놓고도 그를 만나러 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마지막까지 미스터리 한 인물이었다. 폰 메크 여사는 차이코프스키에게 경제적 자유를 누리게 함으로써 그가 편안하게 작곡을 할 수 있게 도와줬지만 예고 없이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끊음으로써 그의 인생에서 사라졌고 차이코프스키는 이에 그 어떤 때보다 침통해했다고 전해진다.     


 차이코프스키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멜로디 잘 뽑기로 유명한 작곡가이다. 창작자는 항상 새로운 시도와 정형화된 형식 사이에서 갈등하기 마련인데 차이코프스키는 새롭고 파격적인 시도보다는 기존 형식을 고수하는 것을 선택한 작곡가이다. 특별히 새롭거나 파격적인 시도를 하지 않지만 아름다운 선율을 작곡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통일성이 결여되고 형식적인 미흡함이 곡 전반에서 드러난다는 혹평을 받는 그가 유독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역시 그의 곡 전반에 흐르는 매혹적인 선율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의 형식을 비판하던 사람들조차 그의 아름다운 선율 창작 능력은 인정을 해줬으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의 사랑이야기에 주목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이 어떻게 탄생되는 것일까에 대한 호기심이 그의 사랑 이야기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비극적 로맨티시스트를 위한 세레나데.     


 차이코프스키의 사랑 이야기를 보면 도대체 이 사람은 이런 사랑을 하고도 어떻게 이렇게 꿈결 같은 멜로디를 끊임없이 써내려 간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자신을 괴롭히는 정신병이 있는 아내와 숨기고 싶은 자신의 성적 취향 그리고 평생 자신을 응원해줄 것 같았던 사람의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 이 모든 상황이 슬프고 가련하지만 그의 음악을 단순히 슬픔으로 정의하기엔 그의 멜로디는 너무 아름답다.     


https://youtu.be/PAeXRJtxbrQ


 차이코프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를 예로 들어보자. 세레나데의 시작은 노을이 지는 저녁때쯤 간단한 악기 하나를 툭 메고 사랑하는 이를 위한 노래에서였다. 차이코프스키는 고전시대 이후에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세레나데 형식에 자신만의 색깔을 더해 현을 위한 세레나데를 작곡했다. 사랑의 노래라고 하기엔 1악장은 낭만적인 선율 전반에 흐르는 우울한 정서가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왈츠 풍의 2악장에서는 우아하고도 밝은 느낌의 멜로디가 우리를 안심시키다 엘리지라는 제목을 가진 3악장에서는 현악기의 매력을 한껏 살리는 웅장한 사운드와 낭만적인 멜로디가 모든 아픔을 잊을 수 있는 찬란한 순간을 만들어준다.  

    

 올해처럼 뉴스에 왜곡된 사랑 이야기가 많이 보도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데이트 폭력에 스토킹에 언제부터 범죄가 사랑 이름으로 변형된 건지 모르겠지만 연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욕망, 집착, 불안, 지배... 등의 잘못된 사랑의 방식이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에 냉소적인 태도를 같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는 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차이코프스키처럼 다양한 색깔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도 드물 것 같고 그처럼 많은 사랑의 아픔을 겪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세레나데가 찬란할 정도로 아름다운 건 그 역시도 사랑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아서 이지 않을까? 그러니... 우리도 희망을 놓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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