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를 만난다.
코로나 2년 차. 이제는 적응이 될 때도 됐는데 아직도 가끔 뼛 속에 있는 에너지까지 쓴 거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코로나 시대는 처음 겪어보는 상황을 계속 던져준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만나는 그 두려움, 당황스러움. 혼란함. 내가 지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처음 겪는 상황을 계속 만나야 하는 것이 힘든 것이다.
“선생님 같은 반에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어요. 오늘 수업 못해요.”
“선생님 백신 다 맞으셨잖아요. 이제 시연해주시면서 레슨 해주시면 안 돼요? 말로만 설명하니까 아이가 못 알아듣더라고요.”
“선생님 안정기가 올 때까지 온라인 수업을 계속해야 할 거 같아요.”
코로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각자 다 다르니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짐을 쌌다 풀었다 한다. 온라인 수업을 원하는 사람도 있고 악기수업은 무조건 대면 수업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보니 나는 악기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컴퓨터를 켰다 껐다 그렇게 정신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시기에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며 힘내라는 친구들의 응원이 때로는 버겁다. 열심히 힘을 내고 있는데 이것보다 더 힘을 내야 한다니.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기엔 지치는 날들이 나의 힘냄 감당 치를 이미 너무 많이 추월했다.
다른 사람들도 내 마음 같은 지 주말 밤인데 윗집의 부부싸움 소리가 점점 격해진다. 윗집 부부는 자신들이 싸우는 이유가 온 사방에 퍼질 만큼 잘 들린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지만 싸우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저들도 삶이 참 많이 힘든가 보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난다. 더 이상 듣고 있는 것은 남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 같아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나게 해 줄 음악을 찾아본다.
나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는 음악.
드뷔시는 내가 애정 하는 작곡가이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찾는 게 그의 음악이기도 하다.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수십 가지지만 그중에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음악이 나를 굉장히 쉽게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현실도피 음악으로 딱이라는 말이다.
드뷔시는 1862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생제르맹 앙레에서 아실 드뷔시와 빅토린 마누리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드뷔시의 아버지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지 못해 이곳저곳 이사를 다니며 돈벌이를 해야 했고 때문에 드뷔시는 유년기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드뷔시는 순탄치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으로 음악을 비교적 늦게 시작했다.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기 불과 1년 전에 피아노를 시작했고 그를 가르친 사람은 전문적 음악가라기보다 음악 애호가에 가까운 모테부인이라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드뷔시를 성의껏 잘 가르쳤고 단기간의 훈련으로 그를 파리 음악원에 입학시켰으니 훌륭한 교육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며 처음으로 정규 교육을 받게 된 그는 파리 음악원 내의 보수적 성격을 가진 교수들과 갈등을 빚는 등의 문제를 일으켰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음악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적 재능은 눈에 띄는 것이었으므로 차이코프스키를 후원했던 폰 메크 부인의 마음을 얻어 예술을 즐기는 부유층 사람들과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그는 상류층 사람들뿐 아니라 파리의 여러 예술가들 (고갱, 프루트스, 드가, 니진스키 등)과 교류하며 그들에게서 얻은 영감을 자신의 음악에 녹여내 새로운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의 음악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색채는 그가 보고 느낀 것 모두를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 발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가 관심 가졌던 모든 것 (미술, 춤, 무용수, 문학, 정치, 식민주의, 오리엔탈리즘 등등)은 그의 음악이 되고 우리를 그의 머릿속 환상의 세계로 이끈다.
드뷔시의 곡 중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차용되는 달빛은 여러 영화와 방송 매체에 현재에도 많이 등장하는데 그 음악이 뱀파이어 영화 트와일라잇에 등장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었다. 판타지 영화에 그의 음악만큼 잘 어울리는 장르가 있나 싶어서였다. 역시 그의 음악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언제나 정신없는 이 세상.
드뷔시의 음악이 개성 있는 색채를 지니며 우리에게 다양한 인상을 주는 이유는 그의 성격과 그가 생존했던 시기의 파리 상황이 그의 음악에 녹아났기 때문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매우 어둡고 우울한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 성향 자체가 불안정했다. 가난했던 유년시절과 달리 어른이 되어서는 부유층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치러운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다양한 계층 사람들을 경험하게 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의 불안정한 성향을 더 불안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드뷔시가 생존했던 1862년부터 1918년은 파리의 벨 포크 시대와 겹치는데 벨 포크 시대는 1871년부터 1941년까지 파리가 가장 급진적으로 발전하고 호황을 누렸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파리는 낮에는 조용하고 전통적인 모습이었다가 밤이 되면 환락과 쾌락의 모습으로 변하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매일 새로운 건물들이 세워지고 놀라운 속도로 기술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파리로 유입되었다. 그야말로 모든 문화가 파리로 집결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한쪽에서는 마차가 돌아다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기차를 타고 사람들이 이동했다. 낮에는 점잔을 떨던 부자들이 경렬 한 춤을 추는 무희들을 보러 물랑 루주에 몰려들었으며 짧은 시간에 갑자기 졸부가 된 사람들은 식민지로 여행을 다니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인종 구경을 나섰다.
새로운 것과 옛것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혼재되면서 당시 파리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드뷔시도 그 영향을 오롯이 받았다. 그의 음악에 광대, 흑인, 요정, 달빛, 소녀, 악마 등 동화 같은 요소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사회적 혼란에서 비롯된 예술적 창작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모호하고 혼란한 세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면서 듣는 사람에게 환상을 선사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겪은 어른들은 그들이 겪은 시대가 가장 격동기였고 6.25를 겪은 세대들은 그 시대가 가장 격동기였을 것이다. 화염병 맞으며 데모하던 학생들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집결했던 사람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는 언제나 혼란했다. 그리고 원인 모를 전염병이 퍼진 현재를 사는 나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혼란하고 어지럽다. 드뷔시의 음악을 들으며 인간은 어쩌면 무한한 변화 속에 적응을 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생명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참 다행이다. 과거 혼란한 세계의 유산이 현재 혼란한 나를 구해주는 구원투수가 되어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