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 반응할 이유는 없었다
민들레 갓털만큼 예민한 마음
갑상선이 잠을 못하게 했다.
3일을 꼬박 지새웠지만 졸리지 않다.
갑상선 기능 저하증은 정 반대의 상황인 항진증을 동반하기도 한다. 어떤 환자는 저하증과 항진증을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는데, 의사도 내게 그럴 수 있다고 했다.
잠을 자도 자도 졸리던 시간이 지났는데, 어느 날 불면증이 찾아왔다. 하루는 한 시간을 자고, 다음날은 누워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다음날은 세 시간 정도 잠을 잘 수 있었다.
피곤함보다는 가슴이 답답한 기분이 더 크게 느껴졌다. 눈이 툭 튀어나올 듯했고 전혀 졸린 증상을 느끼지 못했다. 약을 줄이고 땀이 날 정도로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졸리지 않아도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고, 새벽이 가까워지면 일어나 책을 읽었다. 신기하게도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선명하게 각성되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우울함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머리가 복잡해질 때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본다. 야생초가 무성한 풀숲에 앉아, 홀로 음악을 듣는 그의 뒤로 회색 세포로 무장된 포화로 가 다가온다. 아직은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다. 누가 죽음을 당했고, 누가 죽게 한 걸까? 잘 팔리는 작품을 그리는 유명 화가인 주인공은 사람들 사이에서 빛나는 예술가로 박수를 받으며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딸과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좀 멋대로였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말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변덕스러운 예술가의 기질이라고 수긍하게 했다. 그런 그가 마음 편해 보이기도 했지만, 가족들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보는 건 불편했다. 어느 날 주인공이 그림을 그리다 죽는데, 갑자기 평화롭고 아름답던 저택은 소름 돋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이미 여러 번 본 장면인데도 이상하게 더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갖고 놀듯, 손에 익은 노트를 펼쳐서 뭔가를 써보려 했지만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이럴 땐 아사 크리스티의 탐정 포와로를 만나고 싶다. 내 의뢰를 받아 주시려나 모르지만, 이 문제가 오래전부터 나를 피곤하게 한다고 꼭 해결하고 싶다고 말이다.
내 머릿속이 왜 이렇게 복잡한가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누구일까요?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든 범인일까요?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에서는 탐정들이 사건을 해결할 때 알리바이와 증거물보다는 사람들의 말에서 중요한 단서를 찾는다. 무심코 던진 말이 바로 결정적인 답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아무런 연관이 없는 듯한 말이 실마리가 되어 사건이 해결되기도 한다. 나는 탐정도 아니고 사건을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쓰레기처럼 던져진 말을 분석하고 있었다.
전화 한 통을 받고 나서부터 머릿속이 복잡하다. 아무런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하고 참담한 것일까? 나는 쉽게 주변 사람들로부터 불쾌한 감정들이 전염된다. 모든 것을 흡수한 듯 내 기분도 오염된다. 누군가의 말에 방금 전까지 평온하던 내가 갑자기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내가 뱉은 말도 아닌데 너무도 마음이 쓰인다. 분명히 그의 시선도 마음도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쉽게 반응이 일어난다. 그런 내가 문제인 걸 알고 있지만,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밤에 자려고 누우면 무서운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어른이 나도 걱정 때문에 잠이 안 오긴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또 묻는다.
"엄마는 무서운 생각이 나면 어떻게 해요?"
"..."(쉽게 대답 못하고 있었다.)
"무서워서 잠이 안 와요. 엄마!"
"..."(방금 전까지 통장 잔고가 걱정돼서 애들이 잠들면 확인해 봐야지 하고 있었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아이들에게 말을 했다.
"무서운 생각을 오지 말고 손바닥을 펴서 막아봐. 오지 마!" (말을 해놓고 어이가 없다. 아이가 알아 들었을까?)
누워있던 아이는 손바닥을 펴서 '오지 마'라고 했다.
"그래도 자꾸 무서운 생각이 들어요."
"그럼 멈출 때까지 계속 오지 마 오지 말라고 해야지."
"응, 해볼게. 오지 마. 오지 마."
나도 못하면서 아이에게 말을 해놓고 보니 부끄러웠다. 결국 하던 대로 동화책을 읽어주며 잠을 재웠다. 책은 잠이 오지 않은 아이에게 가장 효과가 좋다. 잠든 아이들을 보며 아무 일 없는 '지금이란 시간' 느꼈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는 책을 끝까지 읽었을 때도 깨닫지 못했던 '지금'을 찾는 것일까? 한 겨울, 나는 따뜻한 집에 가족들이 포근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 그럼 지금 상황은 동화책 이야기 마지막에 나오는 해피엔딩 장면이 아닐까?
그런데 머릿속에 연극처럼 상황을 불러와서 분석하고 있었다. 오늘도 주변 사람이 나를 걱정한답시고 던지는 말을 들었다. 듣는 순간부터 많은 감정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에게 들을 말 뒤에 있는 태도와 그의 시선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내가 뭘 잘 못한 건지 찾으려고 애를 써본다. 결국 답을 내지 못했다.
내게 이런 기분이 왜 생겼는지 알고 싶다고 탐정 포와로에게 의뢰한다면 양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으면서 밤이 늦었으니 어서 잠을 자라며, "Good night!"라고 할 것 같다. 갑상선이 망가지고 나서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아닌 것을 붙들고 있었다.
모든 일에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
예민한 마음은 민들레 갓털만큼 작은 바람에도 흔들렸다.
잡념을 사라지게 하는 가장 좋은 약은 책 읽기지만 그도 소용없을 땐 산책을 나선다. 걷다 보면 예전보다 건강하고 활력 있는 내가 느껴진다.
겨울 도심 풍경은 잔뜩 무게 잡은 회색빛이다.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자동차들을 지나 산책로로 향했다. 집안이 답답해져서 산책을 나서면 잠시 홀가분해지긴 하지만 그 질문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왜 자꾸만 내가 아닌 것을 붙들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찬바람이 걱정이었지만 한낮은 태양이 너무도 보드랍다. 공원에 들어서지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사계장미들 볏짚으로 감싼 채 혹한을 견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원을 벗어나 산책로에 빨간 장미꽃이 눈에 띄어서 사진을 찍었다. 낙엽이 깔린 위로 피어난 늦가을 장미가 봄에 보던 꽃잎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낙엽들이 카펫이 되어 소복하게 깔렸다.
장미꽃을 찍느라 한참 주변을 돌며 장미를 보고 있었다. 뒤돌아 산책로로 나오려는데, 발아래 쌓인 낙엽 위로 무언가 보였다. 민들레가 만들어낸 작고 하얀 갓털 뭉치였다. 하마터면 민들레가 오랫동안 계획안 걸 망쳐버릴 뻔했다. 얼마 전에 꽃잎을 떨구고, 먼 비행을 나갈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바람과 수분 조건이 맞으면 수 킬로미터를 날아가는 경우도 있다니 참으로 용감한 야생화 후예들이었다. 아직 날아가지 않은 민들레 갓털을 그대로 사진으로 담을 수 있어서 좋았다.
민들레 갓털은 작은 바람에도 훅 날아가는 작고 예민함만 가진 줄 알았지만, 사실 갓털은 여행을 떠날 완벽한 준비가 된 열매였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는 갓털이 불안하고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곧 시작될 여행의 설렘을 느끼고 있을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들이 여행을 잘 마치고 꽃으로 피어나길 바랐다.
불쾌한 감정들은 바람처럼 지나는 감정들이었는데, 실패가 무서워 아무것도 안 하고 비관만 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부정적인 말로 나의 소중한 하루를 망칠 수는 없었다. 산책로를 걸으며 나의 소설 첫 문장을 떠올렸다. 언제 완성될지 모르지만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다. 지금 나는 소설을 구상하며 가장 좋아하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리고 내게 불면증상은 또 찾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