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오염을 허락하는 사이
사람은 누구나 더럽게 만난다.
상대방의 말은 물론이요, 눈짓과 몸짓, 머리칼을 매만지는 손의 방향마저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바라보지 못한다. 나의 마음이 묻고, 나의 해석이 달라붙는다. 덕지덕지 나로 오염된 상대방을 바라보며 ‘아, 예쁘네’ 할 때가 있는 반면, 내가 묻힌 마음과 해석을 입고 있는 상대방을 바라보며 ’ 어우, 왜 저래’ 할 때도 있다. 문득, 그렇게 서로 '묻히는' 사이가 되는 것이 친해지는 과정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건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오늘 문득,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 혹은 나라는 존재를 '오롯이 온전하게'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쩌면 불가능한 바람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네 얼굴에 내 감정을 덕지덕지 바를 자유가 있다면, 네가 내 표정에 오해 한 겹쯤 얹을 자유도 있는 거 아닐까. 공평하게, 사람답게.
결국, ’있는 그대로의 나’는 어쩌면 관계 속에서 영원히 보여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환영은 아닐까?
대신, 나의 해석이 덕지덕지 묻은 너의 모습과 너의 해석이 꾸덕하게 들러붙은 나의 모습이 적당히 만나 서로의 '묻힘' 안에 '파묻히는 것‘이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라 생각해 보고 싶다. 그러면 ’상대가 바라보는 나’와 ‘내가 이해하는 나’가 다르다고 해서 굳이 과하게 애쓸 필요도 없고, '내가 알았던 너'와 '새롭게 알게 된 너'가 다르다고 해서 심한 충격을 받을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물론 학대 관계는 예외다).
어차피 알아도 모르고, 몰라도 아는 구석이 있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다. 서로의 묻힘 안에 적당히 오염된 존재로 서로의 더러움을 그러려니 해줄 수 있다면, 조금 더 느슨하고 편안한 상호존중이 가능하지 않을까? 완벽한 몸매를 꿈꾸며 코르셋을 입고 팔뚝과 허리, 허벅지를 돌려 깎는 대신, 내 몸에 맞는 적당한 옷을 골라 걸치고 이곳저곳 자유로이 누비듯 말이다.
내가 이해한 너는 너이나 네가 아니다.
네가 이해한 나도 나이나 내가 아니다.
모든 오염이 꼭 나쁜 건 아닐지 모른다.
기분 좋은 균열 하나, 그 틈으로 밝은 빛이 빼꼼 들어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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