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 수용(Radical Acceptance) #2
** <유해한 학대 면역력 밥상> 매거진은 정신적•정서적 학대를 중심으로 다룹니다. 만약 신체적•물리적 학대로 피해를 받고 있다면, 즉시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합당한 법적 보호 조치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지난 글에 이어 '근본적 수용'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데요, 오늘은 질문으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아래 문장을 읽고 동의하는 문장이 있는지 답해보세요.
✔︎ 진상고객도 진상을 부릴 권리가 있다.
✔︎ 도둑도 도둑질할 권리가 있다.
✔︎ 강간범도 강간할 권리가 있다.
✔︎ 살인범도 살인할 권리가 있다.
✔︎ 학대자도 학대할 권리가 있다.
어떤 답을 하셨나요? 저는 다섯 문장 모두 동의합니다.
네, 오타 아닙니다. 오해도 아닙니다. 저는 진심으로 모두 다 동의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요? 그게 바로 '근본적 수용'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날씨' 비유가 학대 경험자의 입장을 설명하는 비유였다면 (날씨를 설득하려 들지 마세요 참고), 위의 문장들은 모두 학대자의 관점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유해한 학대자가 변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행동을 백 프로 '정당하다'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권리'라고 여긴다는 뜻이죠. 따라서 자신의 언행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에게 거침없이 분노하며 그들을 공격합니다. 자신의 '권리'를 침해했으니 응당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물론, 말도 안 되죠. 하지만 그들의 관점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근본적 수용'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학대자의 학대할 권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정당하고 타당해서 '권리'라고 부르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옳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학대를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절대 ‘수동적 호구되기’가 아니에요.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학대자가 그런 존재이니 나는 이제 ‘나의 권리'를 지키는 일에 집중하겠다는 진취적인 대응입니다. '근본적 수용'은 학대를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학대자와의 심리적 연결을 적극적으로 끊는 방법을 말합니다.
다음 문장을 한 번 읽어보세요.
"어떻게 그런 걸로 화를 낼 수가 있어? 어떻게 소리 지르고 물건을 던질 수가 있어? 어떻게 돈을 숨기고 생활비를 안 줄 수가 있어? 어떻게 아이들을 그렇게 심하게 비난할 수 있어? 어떻게 사사건건 다 트집을 잡을 수가 있지? 어떻게 자기가 해야 할 일도 안 할 수가 있지? 어떻게 내 외모를 가지고 놀릴 수가 있어? 어떻게 나보고 무능하다고 할 수가 있어? 어떻게 내 앞에서 내 친구 흉을 볼 수 있지? 어떻게 내 가족들을 대놓고 비난할 수 있어? 어떻게 매번 그렇게 거짓말을 할 수 있어?" 어떻게 이렇게 까지 비열할 수가 있지?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안 변할 수가 있지?
어떠셨나요?
읽으면서 머리가 지끈거리고 뒷골이 땅기지 않으셨나요? 심장이 벌렁거리고 화가 나지 않으셨나요? 지속적인 학대 가운데 있는 분들은 단순히 이런 말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몸이 생생하게 반응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적 외상 유대감(관련 글 참고 클릭)‘으로 인한 '심리적 자동반사'입니다. 수없이 겪었던 갈등의 순간들, 폭언과 폭력의 장면들, 당시 느꼈던 분노와 좌절, 슬픔과 억울함이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거죠.
이 ‘심리적 자동반사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근본적 수용'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어?”라고 생각하면, 살인자를 맞닥뜨렸을 때 자비를 구걸하거나 정의를 요구할 겁니다. 그래야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까요. 사실상 자신의 목숨을 살인자에게 맡기는 셈입니다. 하지만, 살인자는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고 그래서 나도 죽일 수 있다 생각하면, 살인자를 향해 어떤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인간적 양심에 호소하지도 않고, 처벌받게 될 거라는 협박을 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지금 내가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유해한 학대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학대자의 양심, 학대자의 자비, 학대자의 변화, 학대자의 양보, 이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기대하는 순간, 학대자의 행동에 나를 맡기는 격이 됩니다. 내 몸과 마음의 안녕을 여전히 학대자에게 의존하게 되는 겁니다. 가장 먼저 그 의존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그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학대 경험자의 머릿속에 늘 맴도는 말, “당신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를 버려야 합니다. 학대자를 대할 때만큼은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폐기처분 해야 합니다. 대신, "당신도 그럴 권리가 있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학대자가 말이나 행동, 심지어 눈빛이나 몸짓언어로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려고 할 때.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가장 뾰족하게 내뱉어 나의 감정을 휘저으려 할 때.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을 망가뜨려 분노를 불러일으키려 할 때. 그것도 모자라, 가족이나 친구, 아이들까지 걸고넘어지며 어떻게든 내 안에 혼란과 트라우마의 폭풍을 일으키려 할 때. 그 모든 시도의 전원을 뽑아버리는 마법의 주문이 바로 "당신도 그럴 권리가 있지"입니다.
"당신도 그럴 권리가 있지"라는 사고방식을 실생활에 적용한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학대자가 부당하게 화를 내면 ▶︎ "그래, 당신은 늘 그렇게 화를 내지. 그게 아무리 부당한 이유라고 해도."
학대자가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면 ▶︎ "그래, 당신은 늘 난동을 부리지. 아무리 사소한 이유라고 해도."
학대자가 돈을 숨기고 생활비를 안 주면 ▶︎ "그래, 당신은 원래 비열할 사람이지. 가족의 생계가 걸린 문제에도."
학대자가 아이들을 과하게 비난하면 ▶︎ "그래, 당신은 부모 역할이 뭔지 모르지. 그래서 아이들이 힘들어도."
학대자가 사소한 일에 트집을 잡으면 ▶︎ "그래, 당신이니까 계속 트집을 잡겠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해도."
학대자가 자기 몫을 일을 안 하면 ▶︎ "그래, 당신이 당신 몫을 할 리가 없지. 그게 당신의 의무라고 해도."
학대자가 나의 외모나 능력을 비하하면 ▶︎ "그래, 당신은 늘 남을 무시하지. 그게 당신의 배우자라 해도."
학대자가 내 친구나 가족의 흉을 보면 ▶︎ "그래, 당신이니까 험담을 하지. 친한 가족이나 친구라고 해도."
학대자가 계속 거짓말을 하면 ▶︎ "그래, 당신이니까 거짓말을 하지. 속이 뻔히 보일 때마저도."
학대자의 권리를 인정하기 전과 후의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당신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대신 "당신이니까 그렇게 행동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학대자의 관점에서 볼 때 ‘권리’ 일뿐,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불변하는 본성’이라는 뜻입니다. "당신도 그럴 권리가 있지"라는 말은 "당신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내가 알지"라는 뜻입니다.
근본적 수용은 학대자의 본성이 변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더 이상 사과나무에서 포도를 찾지 않고,
사자에게 달걀을 내놓으라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학대자가 학대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학대자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세요. 학대자와 연결된 나의 정신적∙정서적 연결 고리를 놓아버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세요. "당신도 그럴 권리가 있지"는 학대자를 위한 주문이 절대 아닙니다. 나를 위한 주문입니다. 이제 학대자가 아니라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제부터 날마다 이렇게 생각하는 연습을 하세요.
학대자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학대자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학대자는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학대자는 언제나 지배와 통제만을 원할 것이다.
학대자는 늘 학대를 선택할 것이다.
학대자는 평생 그렇게 살기로 선택한 사람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나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지?"라는 고민에 집중해야 합니다. 학대자의 행동을 바꾸는 대신, 내 감정을 통제 하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유해한 관계에서 해방되는 첫걸음입니다.
꼭 기억하세요. 학대자는 언제나 학대를 선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들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 근본적 수용 이후 "나의 권리를 지키는 길“을 찾는 방법은 다음 글에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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