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미(美)를 울리나?

공작새의 페미니즘과 나의 허벅지

by 겨자풀 식탁

어릴 적 한번쯤 이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왜 동물의 세계에서 수컷이 암컷보다 더 화려하고 예쁘지?"


교미를 위해 화려한 자태로 상대방을 유혹하는 일은 흔히 '여성'의 일이라 여겨온 인간들과 달리, 동물의 세계에서는 '수컷'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종의 보존을 위해 교미는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다. 그러하기에 암컷의 간택을 받기 위한 수컷의 경쟁은 그치지 않는다. 화려한 꼬리깃털을 부채처럼 펼쳐 뽐내는 것도 암컷이 아닌 수컷 공작이다. 이는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면서도 강인함과 미(美)를 유지하는 유전적 우수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설명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리처드 포럼이 쓴 <아름다움의 진화>를 보면, 새들은 탐미주의자들이다. 목숨 거는 수준으로 별별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황금머리마나킨 수컷은 이층 집을 짓는다. 과일이나 잎사귀로 마당을 꾸민다. 색깔을 맞춘다. 곤봉날개마나킴 수컷은 날개를 비벼 노래를 한다. 빨래판 긁는 소리를 제대로 내려고 날개 뼈 안쪽의 칼슘 비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이건 위험한 전략이다. 적자생존, 자연선택에 따르면 미친 짓이다. 날개가 무거워질수록 비행에 방해가 된다. 곤봉날개마나킨은 빨래판 소리만 제대로 낼 수 있다면 그까짓 위험은 감수한다."


프럼은 이를 '미적리모델링'이라 부른다. 암컷 마나킴새들은 심미적 기준으로 배우자를 선택하면서 수컷의 폭력적 성향을 줄여 나간다. 암컷 새들은 성적 자기 결정권을 늘려가는 방향으로 배우자를 택한다. 새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아름다움은 암컷의 성적 자기 결정권에 뿌리를 두고 있다."


- 김소민,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중에서




수컷들의 '미적 진화'가 암컷의 성적 자기 결정권 때문이라는 이 말에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어 동의하고 싶다.


수컷의 폭력성향을 줄이기 위해 심미적 기준으로 수컷을 선택하는 암컷. 수컷이 자신의 유전적 우월성과 강인함을 드러낸다 믿으며 자태를 뽐내는 동안, 암컷은 자신의 자율성 향상을 위해 오히려 더 '고분고분한' 수컷을 고르고 있다. 이토록 지혜롭고 현명한 양성평등 추구라니. 이게 바로 공작새도 간접적으로 보여준 조류계의 페미니즘 역사는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은? 인간 역시 침팬지보다 작은 체격과 덜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지도록 진화해 왔다. 이러한 남성의 "무장 해제" 진화는 여성의 성적 자율성에 기여했고, 이는 다시 영아 생존율 및 성장률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쯤 해서 생각해 본다. 인간 역시 동물처럼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에 영향을 받아왔지만, 어쩌면 그 해석의 방향이 어긋났던 것은 아닐까? '고분고분한 신붓감'이라는 말은 친숙해도 '고분고분한 신랑감'이라는 말은 어색하니 말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소위 말하는 '결혼적령기'라는 틀 안에서 미(美)를 뽐내고자 가녀린 팔과 다리를 원했다. 그때의 나에게 지금 말해주고 싶다. "젠장, 여리한 몸매 걱정 따위 집어 치우라고!“ 20년 전 나는, 나의 미적 리모델링을 고민할 게 아니라 여성인 나의 ‘자기 결정권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추진했어야 했다. 나의 후대를 위해서, 그들의 번영과 성장을 위해서라도.


지나간 세월 어쩔텐가. 지금이라도 달라지면 된다.


이제 나는 거울 속 가녀린 실루엣이 아니라, 스쿼트할 때 단단하게 버티는 허벅지 근육을 본다. 튼튼한 종아리와 무엇이든 거뜬히 받쳐내는 대퇴부 근력을 키운다. 더 이상 거울 앞에서 신체치수를 가늠하며 옷매무새를 고민하지 않는다. 대신, 아령을 들어 올리며 내 팔뚝의 힘을 감각한다.


곤봉날개마나킴 수컷이 빨래판 긁는 소리를 더 잘 내기 위해 날개 뼈 안쪽 칼슘 비율을 높였다면, 나는 손목 보호대를 조이고 플랭크와 푸시업을 한다. 무거워지는 뼈가 내 글과 목소리를 더욱 단단하게 받쳐주도록. 수컷의 무거워진 날개는 비행을 어렵게 할지 몰라도, 나의 촘촘해진 근밀도는 내 생애 남은 비행의 고공행진을 가능케 하리니.


나는 이제 더 이상 '이성(異性)'을 위해 미(美)를 울리지 않는다. 나를 위해 력()을 채워갈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나를 꿈꾸며.



#겨자풀식탁이야기

#유쾌한 나이듦 언니들에게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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