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누구 없소?

쓸쓸한 고독사? 다정한 고독생!

by 겨자풀 식탁

혼밥에도 레벨이 있다. 당신의 혼밥 레벨은?


레벨 1: 패스트푸드점에서 혼자 식사하기

레벨 2: 카페에서 혼자 식사하기

레벨 3: 분식집이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혼자 식사하기

레벨 4: 고깃집에서 혼자 식사하기

레벨 5: 뷔페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혼자 식사하기


'혼밥 레벨 5'도 식은 죽 먹기인 나는 이미 ‘혼밥 챌린저’다. 뷔페에서 첫 접시를 가지러 갈 때도 당당하다.


요즘에는 '혼밥' 외에도 '혼술' '혼코노' '혼영' 등, '혼자 하기'를 일컫는 단어들이 점점 많아진다. '개인주의 사회'를 보여 준다고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드디어 '개인존중 사회'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때로는 커피잔을 사이에 둔 대화보다, 조용히 홀로 마주하는 순간이 나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니까.


그런데 '혼자 하기'는 어디까지 즐거울 수 있을까? 평생 '혼자'여도 그 고요한 평온이 즐거울까?


결혼 적령기를 넘긴 친구들과 ‘우리, 결국 고독사하겠지?’라며 낄낄댄 적이 있다. 가볍게 웃어 넘기기에는 꽤나 묵직한 농담이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홀로 맞이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유쾌한 나이듦 사유거리는 혼자 하기의 끝판왕, '고독사'다.




<그런 나이는 없습니다>에서 홍재희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혼자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눈을 감고, 어느 날 우연히 방문한 누군가가 죽어 있는 나를 발견할지라도, 죽기 전까지 내가 스스로 하루를 견디고 일상에 만족하고 있었다면 그 죽음도 그리 나쁘지 않다. 그러므로 내 죽음이 '고독사'로 불리지 않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단단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저자의 아버지는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음에도 임종의 순간 홀로였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침을 준비하느라, 동생은 일찌감치 출근을 해서, 언니는 외국에 살아서, 본인은 독립해서 따로 살고 있어서. 가족이 있어도 결국 '고독사'였다 했다. 따지고 보면, 임종의 순간만큼은 누구나 혼자라는 말이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 손을 꼭 잡아줄 사람이 있다 해도 결국 그 길은 혼자 걸어야 한다. 고대 사람들이 동서고금 막론하고 순장(殉葬)을 했던 건, 그 길을 홀로 걸어가기 싫어서는 아니었을까? '순장'까지는 아니라 해도, 우리 모두는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 욕망이 ‘홀로됨’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거기 누구 없소?'를 외치느라, 죽음의 순간이 오기도 전에 생의 자리에서 조차 서둘러 공포를 초청하는 것은 아닐까?


‘좋아요’ 하나에 작은 쾌락을 느끼고, 댓글 하나에 존재를 확인받으며 살아가는 세상이다. 알림이 하나 뜰 때마다 도파민도 따라터진다. 우리는 혹여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 한 방울을 원하지 않을까? 임종의 순간이 다가올 때 마지막 기력을 끌어 모아 사진을 찍어 올리고, 끝끝내 '좋아요'를 하나라도 더 끌어안고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뼛속까지 관종인 내 이야기다).




어쩌면 고독사보다 두려운 것은 ‘고독생’을 가난하게 만드는 마음이다. ‘함께’만을 갈망하다가, 정작 나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을 놓칠 수 있으니.


<우리, 나이드는 존재>에서 김희경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고독사에 대한 과장된 공포 때문에 혼자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해 있는데, 고독사와 고립사는 다르다. 고립되어 살다가 그 상태로 죽는 '고립사'가 우리가 두려워하는 고독사의 실제 내용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 나름대로 연결된 관계 속에서 잘 살아왔다면 임종을 지키는 사람 없이 혼자 죽는 고독사를 맞이한들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일까."


모든 관계를 절연하고 방구석에 틀어 박혀 있지 않은 이상 '고립사'할 확률은 매우 낮다. 그렇다면, 태초부터 홀로 걸어가도록 만들어진 '죽음'의 관문을 나 홀로 통과하는 '고독사'는, 어쩌면 그저 자연스러운 삶의 귀결이다. 그 순간이 외롭다 느끼지 않기 위해 타인을 내 곁에 두기보다는, 내가 나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다정한 고독사'를 위해 혼밥의 식탁 맞은편 자리에 '나'라는 존재를 마주 앉힌다. 홀로인 순간에도 따뜻한 온기를 채우는 연습을 한다. 오늘 하루 내 혼밥의 순간이 다정할 수 있다면, 함께함 사이사이 깃든 나의 '고독생'도 다정할 것이다.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고독생'의 순간들이 쌓이면, '고독사'의 문 앞에서도 나는 나를 다정하게 배웅할 수 있을 것이다.




#겨자풀식탁이야기

#유쾌한 나이듦 언니들에게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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