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달팽이의 설움,

더부살이

by 철없는박영감

갑자기 무주택자가 됐다. 더 나쁜 건 있다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없었다면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있다가 없어지면 이미 기회를 한번 써서 다시 기회를 얻으려면 십수 년이 걸린다. 먹어 본 놈이 맛을 안다고, 아예 모르는 맛이면 저게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는 맛이면 참기 힘들고 더 괴롭다. 내 집에 인테리어도 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벽걸이 TV도 달고, 그림, 액자도 달다가 전세로 살려니 제약이 많았다.


그보다도 먼저 약 일주일간의 보관이사 기간에 내 집 없이 캐리어에 간단히 옷 몇 벌, 세면도구만 챙겨서 부모님 집에서 더부살이하는 것이 더 문제였다. 예전에는 부모님 집에 머물다가도 뭔가 분위기가 안 좋아지거나 잔소리가 심해지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전주로 내려가버리면 그만이었는데 이제는 도망가버릴 곳이 없어졌다.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하는 인고의 시간이 도래했다. 며칠간은 하하 호호 웃음 가면을 쓰고 잘 버텼다. 하지만 점점 힘들어졌다. 이사계획, 정리계획,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항상 끝은 "네가 계약을 너무 촉박하게 잘못해서 그래"였다. 예전에 부모님의 감정쓰레기통으로 이용되었던 전적이 있어서 그냥 넘겨 버리기 점점 힘들어졌다. 그러다 빵 터졌다.


27일 전셋집에 짐 들어가는 날이 다가오면서 부동산을 통해서 이런저런 일정을 조율했다. 짐을 뺄 때도 그랬지만 짐 들어가는 날도 역시나 날씨가 문제였다. 27일까지 전국적으로 집중호우를 예보하고 있었다. 거기다 26, 27일은 손 없는 날로 이사를 많이 하는 날이었다. 특히 26일은 월요일이라서 직장인이라면 토, 일, 월 이렇게 3일간 이사를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27일 이사를 앞두고 26일에 아파트를 둘러보니 억수로 내리는 비를 뚫고 세 집 정도가 이사를 하고 있었다. 빗 속에서 사다리차로 짐을 옮기는 모습이 내일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이사 가기로 한 전셋집은 착한 집주인을 잘 만나서 도배까지 새로 해주었다. 그래서 입주 청소를 해야 하는데, 부모님은 청소하는데 무슨 돈을 들여서 하냐며 직접 하겠다고 청소도구를 챙기셨다. '입주 청소가 보통일이 아닌데'라고 걱정도 됐지만, 전에 살던 집에 입주 청소를 했을 때, 대충 하고 돈만 챙겨갔던 사기꾼들이 생각나서 '어차피 노는데...'라는 생각에 직접 청소를 하러 나섰다. 처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는 도배를 새로 해서 전체적으로 깨끗해 보였다. 그래서 별로 청소할 것 없겠다고 안심했는데, 구석구석 청소를 할수록 도배를 어떻게 했는지 바닥은 온통 풀로 뒤범벅되어 있었고, 거기다가 도배하면서 쓴 커터칼날이 풀과 함께 바닥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위험하기까지 했다. 그나마 쉬운 창틀과 베란다 청소를 부모님께 맡기고 나는 바닥 청소에 집중했다. 물걸레로 바닥에 풀을 닦는데... 안방 바닥만 닦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렇게 닦았는데도 바닥은 아직 풀이 남아서 끈적거렸다. 이건 그냥 물청소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았다. 스팀청소가 필요했다. 다행히 깔끔쟁이인 나는 스팀 청소기를 갖고 있었다. 트렁크에 고이 모셔두었던 스팀청소기를 가동했다. 결과적으로 물청소보다는 훨씬 수월했지만 오후 내내 바닥만 닦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10여 년 전에 동생이 자취할 때 썼던 행거를 미리 설치하려고 했다. 이미 부동산을 통해 잔금 치르기 하루 전에 청소하면서 행거설치를 허락받아 놓은 상태였다. 전에 살던 집에는 시스템옷장이 붙박이로 있었지만 30년 가까이 된 낡은 아파트에는 따로 옷방에 행거를 설치해야 했다. 내일 포장이사를 하는데 행거가 없으면 옷을 둘 곳이 없었기 때문에 미리 양해를 구해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여기서 또 태클을 걸었다. 꼭 27일에만 짐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이건 짐도 아니고, 행거만 설치해 놓는 거예요. 그리고 전주에서 온 것도 아니고 우리 집에 있던 것 옮기는 건데... 방향도 우리 집에서는 남동쪽이구만요."

나는 최대한 논리적으로 마일드하게 생각을 말씀드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절대로 절에서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였다. 엄청나게 화가 났지만 최대한 누그러트려 말했다. 이제는 화가 나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이사 좀 편하게 해 보려고 부동산이랑 집주인한테 양해 얻어 놓은 건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나도 기분이 나쁘죠? 그렇게 얘기하지 마시고, 이건 제가 계획한 대로 좀 진행할게요".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을 결국,

"네가 계약을 너무 촉박하게 잘못해서 그래"였다.

여기서 빵 터졌다.

"애초에 가만히 전주에서 잘 살고 있는 사람 빨리 이사오라고 닦달한 게 잘못이지요. 안 그래도 내일 이삿날 비 때문에 신경 쓰여 죽겠는데... 이사오라고 닦달해서 감면받았던 취득세도 뱉어내게 생겼는데... 도대체 어쩌자는 거예요?"

설움이 복받쳐서 사춘기 때도 안 했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집주인도 주지 않던 집 없는 설움을 여기서 당하네...' 이상하게 이번 이사는 너무 어려웠다. 걸리는 것도 많고, 하지 말아야 할 것도 많고... 다 잘 살아보자고 하는 짓인데, 그전에 내가 나가떨어질 판이었다. '에휴 집 없는 설움 예행연습 정도로 일단 넘겨야겠지?'라고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결과적으로 행거는 설치하지 못했다. '이건 뭐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다 부모님 허락 맡고 움직여야 하는 건가?' 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허탈함도 같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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