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정산내역이라며 인사팀의 메일을 받았다. 퇴직금만 처리되면 진짜 안녕이다. 메일 내용을 대충 훑었다. 되도록 빨리 회사와 인연을 끊고 싶어서 자잘한 것들은 그냥 넘어갔다. 퇴사 전에 계산했던 금액과 얼추 비슷했다. 다만 퇴직연금제도 때문에 바로 급여통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회사를 포함한 총 11개의 운용사에서 ‘개인 IRP’라는 계좌로 넣어준다고 한다. ‘개인 IRP’ 계좌 개설은 스마트뱅킹으로 간단하지만, 해지는 은행에 직접 가야 된다. 해지하고 급여통장으로 받으면 당연히 세금도 붙는다. 수백만 원이 빠져나가는데, 세금을 아끼려면 10년 이상 더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그냥 현금을 확보하기로 했다. 정산 후 며칠이 지나면 그 사이 운용수수료가 빠져나간다고 해서 정산이 확인된 바로 다음날 은행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 사는 곳은 근처에 주거래 은행이 없었다. 예전에는 그냥 차 끌고 다녀왔는데, 이제는 수입도 없고, 기름 값도 비싸고, 주차 스트레스도 있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남는 게 시간이 되면서 소비할 때 최우선 고려 사항은 비용이다. 요즘 말로 무과금 유저 되시겠다. 그래서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우리 집은 버스종점이어서 출발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시간 맞춰 나가면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탈 수 있었다. 그렇게 출발시간에 맞춰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보니, 이게 웬일인가? 에어컨이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신세계가... 세상 참 많이도 변했다. 버스정류장에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다니.’ 또 한 번 세상 변하는지 모르고 회사라는 우물 안에서 아등바등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래서 정년퇴직하고 사기를 많이 당하나 보다.
목적지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를 찾아 출발시간에 맞춰 나가니 불편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학교 다닐 때, 피곤한 몸으로 만원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졸면서 다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종점에서 타면 앉아서 갈 수 있겠다며 좋아했는데, 출퇴근 시간을 피하니 앉는 것은 당연하고, 여유롭기까지 했다. 평일 낮에 탄 버스는 여행이 되었다. 재미도 쏠쏠했다. 움직일 때는 운전할 때 볼 수 없었던 창밖 풍경을, 멈췄을 때는 승하차하는 사람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길이 안 막히니 정차 간격도 짧아져 구경거리는 변화무쌍했다. 스마트폰 쳐다볼 새가 없었다. 이어폰으로 좋아하는 노래까지 듣고 있으니 재미는 배가 되었다. 그 뒤로도 멀리 가야 하는 일이 있으면 버스를 탔다. 버스 노선을 검색하며 목적지를 찾아가는 재미도 추가되었다.
돌아올 때는 어느 정도 기다림이 불가피했다. 동네 정류장에는 있던 에어컨이 시내 정류장에는 없었다. 너무 더워서 한 번에 가는 버스를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환승을 하면서 왔는데, 더위에 대기하는 것만 빼면 이것도 재미있었다.
‘이렇게 뭔가를 애타게 기다려본 적이 언제였더라?’
환승하며 목적지에 도착하면 새로운 모험 루트를 뚫은 기분이었다. 세상이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주어지거나 떠맡은 것이 아닌, 작지만 스스로 하는 일은 재미있었다. 자가용으로 '더 멀리, 더 빠르게, 더 깊숙이' 갈 수 있는 능력이 생겼지만, '덜 지치게, 덜 힘들게, 덜 스트레스받게' 가는 능력은 빼앗겼던 것 같다. 다시 버스로 '더 신나게, 더 재밌게, 더 여유롭게' 목적지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