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처 영어도서관에서 ‘마음 학교’라는 성인 대상 철학 강연을 한다는 현수막을 보고 참가신청을 했다. 이전에도 미술 인문학 강연에 참석했었다. 평소에 미술 관련 활동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터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참석자는 10명 남짓이었는데, 7~8명이 도서관 관계자들이었다. ‘공단 내 주거지역에서 평일 오전 인문학 강연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은퇴자를 위한 프로그램이라지만 전시행정 같다’는 살짝 비뚤어진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강연이라는 것을 처음 경험해 봤고, 관심 분야여서 나름 알찬 시간이었다.
홈페이지에 소개된 커리큘럼을 보고 '혼자라서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철학과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기대도 했다. 규모도 꽤 있어서 전시행정 같은 느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첫날 화면에 띄어 놓은 강의 계획서는 예상과 많이 달랐다. 혹시나 했던 참석자는 역시나 낯익은 얼굴들이 절반이 넘었다. ‘머릿수 채우러 왔겠지만, 강연도 듣고 월급도 타고, 꿀보직이라는 말을 이런 경우에 쓰겠지?’라는 완전히 비뚤어진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계획서는 홈페이지에 홍보되어 있는 내용과도 다른 방향이었다. 토론 수업인데 강사가 화두를 제시하고 팀을 짜서 토론을 하는 방식이었다. 철학이 시작된 고대 그리스의 강연 방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이미 이런 방식에 익숙하다. 회사 연수원에서 지겹도록 많이 해봤다. 프로젝트를 주고 결과를 발표하는 식이다. 구성원들이 합의점을 찾으며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도 하고, 논쟁도 하면서 결론을 내는 방식이다. 회사 생활 시뮬레이션이라고 하지만 사실 말이 좋아 시뮬레이션이지 어디까지나 계급장 떼고 만난 사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회사는 철저한 상명하복이다. 신입사원 때, 저 사탕발림에 넘어가 열정이라는 미명하에 겁 없이 여기저기 많이 덤비고 다녔다.
갑자기 시작된 ‘Re:회사생활‘에 당황할 새도 없이, 염증을 느꼈던 인간 군상, 시기와 질투가 그대로 재현됐다. ‘돌아이 질량 불변의 법칙’이라고 했던가. 기대했던 ‘마음속에 떠다니는 개념들의 상호작용으로 새로운 아이디어가 창조되는 것’은 어디로 갔는가. 소개 자료에 있는 ‘마음 학교’는 대체 어디로 간 건가.
돌아이 짓을 직접 목격하고 싶지 않아서 바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예의상 조금 더 있어보기로 했다. 강연이 진행되면서 역시나 ‘돌아이’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첫 테이프를 끊은 사람은 사춘기 자녀와 대화가 없어서 고민이라고 했다. 자녀가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게 특히 속상하다고 했다. 계속 듣다 보니 진짜 고민은 ‘자녀가 시키는 대로 안 한다’였다. 아직도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돌아이’ 1번 등장이다.
다음은 절대 본인 얘기는 아닌데, 강사님 말씀대로 자녀를 비판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교육했다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면 어떻게 하냐고 질문했다. 이어서 강사가 대답했으나, 못 알아들은 건지, 그런 척을 하는 건지, 뉘앙스를 살짝 바꿔가며 결국은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해답을 요구했다. 아마도 듣고 싶은 대답이 따로 정해져 있었으리라 추측해 본다. ‘답정너’ 식으로 남의 고민을 질문하는 전투적인 돌아이 2번 등장되시겠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참았으나 돌아이 3번 등장으로 바로 쉬는 시간에 도망쳤다. 괴상한 유머로 자신의 참신함을 어필하는 꼰대 부장님 스타일 등장이다. 발표 중에 예전에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면서 여성들의 기회가 없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이크를 뺏어든 ‘돌아이’ 3번이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 맞다’라면서 하늘은 값어치가 없는데, 땅값은 점점 비싸지니 여자들이 더 존귀해진다는 쓴웃음도 안 나오는 어이없는 유머를 던졌다. ‘돌아이’ 3번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바로 튀었다.
‘차라리 혼자 고민하는 게 낫겠다. 혼자가 낫다...’
큰 강은 강가의 작은 굴곡을 서서히, 은근히 없애버린다. 그런 잔잔한 큰 흐름에 따라 흘러가면서, 그 안의 '나'는 침몰하고 있다는 느낌이 싫어서 퇴사를 했는데, 다시 그 안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바다로 흘러들어 짜디 짠 소금물이 되기 전에 얼른 작은 지류로 도피해야 했다. 나는 굽이쳐 흐르기도 하고, 고여 있어 보기도 하고, 폭포로 번지점프해 보기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