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친 데 덮친다고, 근력운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 허리 디스크가 와버렸다. 건강해지려고 운동했는데, 2개월을 꼼짝도 못 했다. 재활치료나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집에만 있었다. 슬슬 허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아 아침 산책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전에는 새벽 6시 정도면 밖이 훤했는데 지금은 산책 시작할 때 여명이 밝아오고, 집에 도착할 때 날이 완전히 밝는다. 집을 나설 때 어둑어둑하던 하늘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환해지며 풍경이 변한다.
산책을 시작할 때, 해가 막 뜨려고 할 때,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색은 정말 예쁘다. 회색빛 하늘이 점점 보라색을 띠다가 슬슬 불그스름하게 변하는가 싶으면 어느 순간 갑자기 파란 하늘이 된다. 하늘의 예쁜 파스텔톤 그러데이션에 빠져있다가 문득 배경이 눈에 들어온다. 여명이 밝은 그 짧은 시간,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은 여명이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도록 자신의 존재감을 죽이고 조용히 회색의 배경이 되어 준다. 회색빛 산에 대비되어 여명은 그 색을 더 아름답게 뽐낸다. 해가 다 뜨고 나면 이번에는 하늘이 존재감을 죽인다. 그리고 산이 녹음을, 가을이면 울긋불긋함을 뽐낸다. 존재감을 죽인 하늘은 구름이 흰 붓질을 할 수 있도록 푸른 스케치북이 되어준다. 그 시간의 주인공이 최고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본질을 숨기고 한껏 자세를 낮추고 멋진 앙상블을 이뤄낸다.
그동안 나는 언제 어디서든지 주목받고 싶어 했다. 주인공만 하려고 했다. 요즘에는 ‘관종’이라고 하던가? 나만 튀려고 했다. 잘 눈에 띄지 않는 부분에서도 남들과는 다르고 싶어 했다. 그렇게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으면서 남들과 다르다는 특권의식과 허영심이 가득했다. 늘 작업복을 입고 일을 하지만 안경테를 자주 바꾼다던가, 튀는 디자인의 가방을 메고 다녔다. 거의 입지도 않을 명품 옷을 계절마다 사기도 하고, 할부로 천만 원대 가전을 턱턱 사기도 했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에게 자랑하며 주목을 끌었다. 회의를 하거나 업무보고를 할 때도 남들도 할 법한 아이디어는 가차 없이 버렸다. 늘 독특한 발상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꼭 힘주어 관심을 끌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주인공이 되는 흐름이 온다는 것을 회색산과 푸른 하늘을 보며 깨달았다. 지금은 내가 주인공이 아닌 시간일 뿐이다. 대신 주인공이 돋보일 수 있도록 배경으로서의 현재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 된다. 주인공이 되는 그 시간에 돋보일 준비를 하면 된다. 환경만 변했을 뿐, 나는 그대로다. 내 안의 여명도, 녹음과 가을빛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은 배경이 되어보는 거다. 늘 독기를 뿜어내던 피곤했던 나를 버리고 주변을 받아들이는 잔잔한 내가 되어보는 거다. 배경이 된다는 것… '나 잘났다'라고 마구 튀는 것들을 조용히 하나의 범주로 잡아둔다는 것. 이것도 엄청난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