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고 계절이 2번 바뀌어 간다. 백수 생활을 위해 6개월 정도의 생활비를 만들어놨는데 밖이 쌀쌀해지는 만큼 통장 잔고도 쓸쓸해져 간다. 퇴직금은 애초에 허튼짓 못하게 최후의 보루로 정기예금으로 묶어 놨다. 그나마 요즘 은행 이자가 높아서 위안이 되지만, 그래도 생활비 통장이 ‘텅장’이 되어가니 ‘이대로 계속 가도 될까?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나?’ 불안감이 든다. 그러면 그동안의 백수일기를 보면서 퇴고도 하고 '아직 때가 덜 벗겨졌구나.’ 생각하며 초심을 되찾는다.
언제부터 통장 잔고가 내 기분을 좌우했나? 사실 월급을 받던 시절에도 월급날만 반짝이고 하루 이틀이면 카드 값으로 전부 빠져나갔다. 게다가 월급보다 카드 값이 더 나오는 달에는 만기가 얼마 안 남은 적금을 깨기도 하고, 잘 오르고 있는 주식을 처분하기도 했다. 그렇게 마이너스가 되어도 괜찮았는데... 지금처럼 이렇게 장기간 내 통장 잔고가 많았던 적이 없었는데도 불안하다. 이제 직장인 우대 적금은 들 수 없다는 불안감? 앞으로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불안감일 것이다. 다달이 들어오는 월급의 안정감…, 밑 빠진 독이지만 계속 물을 부어주는 그런 안정감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좀 멋있게 살겠다고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허세를 부리다가 망해도, 매달 들어오는 월급이 있으니까 기꺼이 내 미래를 저당 잡혀 월급의 노예로 살았던 날들이다.
신분 상승을 해야겠는데 아직 할부로 허세를 부려놓은 잔재가 남았다. '비싼 거 질러 놓으면 회사에 붙어있겠지?'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제약회사 영업사원일 때, 계속 밖에서 일하다 보니 제대로 쉴 곳이 없어서 작은 차를 한대 뽑았다. 그랬더니 '요놈, 회사 오래 다니겠구나'라고 판단한 상사의 갈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노예생활의 시작이었다. 이번엔 좀 작게 77인치 TV를 질렀다. 그리고 그만뒀다. 그때와 어떻게 이렇게 똑같은지… 알면서도 반복한다. 단번에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통장 잔고가 '0'이 되는 연말 즈음 잔재를 전부 청산하고 진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는 정말 모아놓은 돈을 까먹으며 생활해야 한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으니 불안감이 점점 사라진다. 신분 상승과 통장 잔고를 놓고 고르라고 하면 고민 없이 신분 상승을 택할 것이다.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내 안에 쌓은 것들이 너무 적다. 무언가를 키워내기에는 양분이 덜 쌓였다.
아마도 쌓는 기회와 자유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정말 좋다. 지금 일기를 다 쓰면 기타를 잡을 것이다. 그동안 이어폰으로만 듣던 “Moon River” 기타 반주를 연습하는 중이다. 한 곡만 열심히 파는 중이다. 할 수 있는 곡이 "Moon River"뿐이라도 좋다. 기쁠 땐 기쁜 “Moon River”를... 슬플 땐 슬픈 “Moon River”를 연주하고 노래 부르며, 내 안의 무엇인가를 키워서 꺼내보려고 한다. '내 안의 무엇이' 무엇일지 정말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