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생활이 6개월 정도 지나가니 루틴이 하나씩 늘어간다. 그중에 하나가 아침 산책이다. 퇴사 직후에는 혼자서 운동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나빠져서 어쩔 수 없이 PT를 받았다. 스트레스 없이 살아서 그런지 PT 횟수를 채워갈수록 점점 혼자 운동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됐다. 중간에 디스크라는 위기도 왔지만 어느덧 PT횟수를 다 채웠다. 추가 등록은 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부담도 되고, 코로나19 백신을 안 맞아서 조심스러워지기도 했다. 그래서 홈트레이닝을 위해 공복 유산소 운동의 일환으로 아침 산책을 더 열심히 다니게 되었다. 이제는 일어나서 자연스럽게 유산균을 먹고, 아침 산책을 다녀온 뒤, 식사를 하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예전부터 걷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예찬 글들을 많이 읽었는데,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공감도 잘 안 됐고, 방법을 따라 해도 저자와 비슷한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잊혔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걷기 예찬 글을 쓰고 싶어 한다. 걷기가 다른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나 혼자만의 깨달음이다. 아마도 공감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처음에 걷기는 운동의 의미가 컸다. 정해진 시간 동안 (보통 한 시간을 걷는다) 열심히 땀을 내고 칼로리를 소모해서 지방을 태우고자 했다. 숨이 차거나 누군가와 경쟁해야 하는 운동을 싫어했던 나에게 걷기만큼 알맞은 운동은 없었다. 걷는 시간 혹은 걸음 수로 목표를 정할 수 있고, 가볍게 등에 땀이 날 정도만 걸으니 숨을 헐떡여야 할 정도로 격렬하지도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가 못해야 점수가 나거나 이기려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칼로리 소모만을 생각하며, 목표 달성을 위해 걷고 또 걸었다. 체지방률을 낮추겠다는 목표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집중의 대상이 '숫자'가 아니라 '나'로 바뀌었다. 시작은 이랬다. 걷다 보니 이상하게 왼쪽 양말만 계속 벗겨졌다. 걷기를 멈추고 고쳐 신어도 양말은 금세 다시 벗겨졌다. 목이 긴 양말로 바꿔도 마찬가지고, 발이 건조해서 그런가 싶어 풋 크림을 잔뜩 발라도 마찬가지였다. 왼쪽 양말만 벗겨지는 이상한 현상에 관심이 쏠렸고 해결하고 싶어서 계속 원인을 찾았다. 그러면서 걷는 자세에 주목하게 되었다. 우선 걷는 동안 양쪽 발 모양이 달랐다. 오른쪽 발은 발가락을 쫙 펴는데 비해, 왼쪽 발은 꽉 오므리고 있었다. 그러니 양말이 발끝으로 조금씩 계속 말려 올라온 것이었다. 걸을 때 양쪽 발 모양이 다른 것을 40년이 지나서야 자각했다. 그 이유를 파고들었다. 나는 왼손잡이인데, 발도 왼발잡이인가 보다. 왼발로 지면을 꽉 잡고 오른발을 쭉 뻗어 걷고 있었다. 그래서 왼발과 오른발의 보폭이 달랐다. 걸을 때 왼쪽 골반에서 딸깍 소리가 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 다리 길이를 재보면 왼쪽 다리가 더 짧을 것 같다. 그동안 PT 받으면서 몸의 균형이 틀어져 있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사실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갑자기 깨달았다. 몸이 뒤틀려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몸 상태를 자각하게 되니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지금도 노력 중이지만, 한 가지 찾아낸 방법이 양발의 보폭을 맞추기 위해 보폭을 최대한 넓히고, 걸을 때 사용하는 근육을 느끼며 천천히 걷는 것이다. 여기서 걷기의 마법이 시작된다. 근육들의 움직임을 느끼며 천천히 넓은 보폭으로 걷다 보면 잡생각이 없어지며 몰입하게 된다. 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읽다 보면 어느새 몰입하게 되는데, 그 기분이 정말 개운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보다 보면 어느새 한 권을 뚝딱 읽게 되는데, 몰입해 읽고 나면 스트레스가 사라져 개운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내용도 오래 기억된다. 걷는 것도 몰입해서 걷다 보면, 근육들이 유기적으로 잘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균형이 맞혀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마치 축지법이라도 쓴 것처럼 힘들이지 않고 어느새 동네 한 바퀴를 뚝딱 돌게 된다. 균형이 맞춰지니 몸이 가벼워지고, 가벼워지니 머리가 맑아진다. 지금은 가족들 전화번호뿐만 아니라 은행 계좌번호까지 모조리 외우고 다닌다. 이제는 생각이나 글이 막히면 일단 옷을 갈아입고 산책을 나선다. 그렇게 머릿속에 뒤죽박죽 섞여 있는 개념들이 걸으면서 정리되는 경험을 많이 한다. 새로운 관점이나 아이디어의 발견은 보너스이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라는 생각에 지배된 적이 있었다. 원인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이생망'이라며 단념했다. 그렇게 인생이 점점 뒤틀려 가고 있는데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터졌다. 아침에 눈뜨면 햇살 비치는 창문으로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러면 깔끔하게 정리될 것 같았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나아졌지만 증상만 치료한 것이었는지 이번엔 간수치가 높아지며 건강에 문제가 생기며 다시 터졌다. 더 이상 버티기는 안 될 것 같았다. 인생의 암덩어리들을 제거해야 했다. 이제는 인생도 몸도 균형을 되찾을 거다. 그 시작은 보폭을 넓혀서 천천히 걷는 것이다. 그렇게 몸의 균형을 찾고, 생활의 균형을 찾다 보면 어떤 인생이 될까? 천천히 넓은 보폭으로 진짜 인생을 걸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