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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건지겠지 내가 있는 인생샷,

내 인생샷 속에는 내가 없던데...

by 철없는박영감


나름 작가 같은 분위기를 낸다고 얼죽코(얼어 죽어도 코트) 상태로 내가 아는 중에 가장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첫 장을 펼친다. 두껍지도 않고 띠지에 ‘2022 노벨문학상 수상’이라고 크게 쓰여 있어 카페에서 폼 잡고 읽기 딱 좋은 책이다. 햇빛이 잘 드는 아늑한 구석 자리에 앉아 책에 빠져있다가 갑자기 어수선함을 느껴 고개를 든다. 이 카페는 인생샷 명소로 유명해서 항상 사람이 많다. 몇몇이 무리를 지어 카페에 들어서면서 너무 좋다며 아주 잘 찾아왔다며 신나 한다. 약간 흥분한 듯한 높은 톤의 목소리가 차분한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바꾼다. 시선이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포토존 주변 사람들에게 멈췄다. 그들은 하나같이 ‘지금 찍고 있는 사람이 언제 끝나나’ 눈치 싸움 중이다. 마치 하이에나 무리가 사자들이 사냥감을 다 먹고 떠나기를 바라며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것 같다. 찍고 있는 사람들도 정신력이 대단하다. 그 시선을 다 느끼며 아랑곳하지 않고 사진 찍기에 열중하고 있다.


새해 첫날 공원을 산책하는데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다. 꽤 이른 시각에 해를 보러 나와서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 놀랐다. 이 공원이 해맞이 명소까지는 아니지만 일출이 꽤 예쁘다는 것은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온 동네 사람들이 여기에 다 모여 있는 것 같다. 여명이 밝아오자 여기저기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 찍을 준비를 한다. 그런데 평소에 굉장히 익숙하지만 생각해 보면 조금 특이한 광경이 연출된다. 새해 첫해가 뜨자 사진을 찍으려고 사람들이 일제히 등을 돌린다. 셀카를 찍는 사람도 있고, 누가 찍어주는 사람도 있다. 해를 보러 와서 막상 해가 뜨자 사진을 찍기 위해 등을 돌린다. 등 돌리지 않은 사람들도 대부분 스마트폰 액정 화면으로 해를 본다. 직접 눈으로 맞이하고 있는 극소수 사람들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실상은 추워서 사진 찍기가 귀찮은 것 같다. 특이점이 온 장면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나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 사진 찍기 행렬에 동참한다. 일출을 향해 스마트폰 셔터를 누르고 잘 나왔는지 확인하려고 사진앱을 보는데, 근래 찍은 사진들 속에 대부분 내가 안 찍혀있다. 혼자 다니면서 내 시점으로 본 인상 깊은 풍경과 순간들을 찍었기 때문이다. 화면을 한참 쓸어내리니 내가 찍혀있는 사진이 나온다. 셀카봉을 처음 샀을 때 찍은 것들이다. 그 셀카봉은 지금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 옛날 사진 속에 나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거나 이상한 설정으로 점프를 하고 있다. 어디 꺼내놓기 부끄럽고 추억을 소환하지도 못할 정도로 그야말로 쓰레기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스친다. 유명한 인생샷 명소에 서서 보는 광경은 어떨까? 하이에나 같은 그 시선들은 어떤 느낌일까? 해를 등지고 서면 뭐가 보일까? 해 뜰 때의 감동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어딘가를 가거나, 산책을 하거나, 또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좋은 풍경을 보면 그 속에 있는 내 모습을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상상하던 바로 그 자리에 서면 뭐가 보일까?


날렵한 가죽 서류 가방을 들고, 백화점에서 산 말쑥한 브랜드 정장을 차려입고, 목에 사원증을 두른 상태로 구두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선릉역을 빠져나와 테헤란로를 걸어 출근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가보니 알았다. 백팩을 등에 딱 붙여 매고, 헐렁한 맨투맨 티셔츠와 구겨진 면바지를 입고, 챙이 작은 모자를 쓴 상태로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출근하는 사람이 훨씬 고액 연봉자라는 것을... 회사에서 승진시험 대신 6 시그마 MBB 인증시험을 보게 했을 때, 전동책상과 고가의 스탠드를 사면서 그 앞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가보니 알았다. 전동책상의 높이와 스탠드의 밝기를 조절하면서 시간을 다 보내고, 정작 침대에 엎드려 책을 볼 때가 더 능률적이라는 것을... 기숙사의 체류기간이 만료되어, 하는 수 없이 집을 장만해서 나오게 되었을 때, 집안 인테리어를 싹 고치고 식기들도 장만하여 매일 파티를 열고 노는 ‘나래바’를 상상했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가보니 알았다. 파티가 끝나고 난 뒤 설거지와 청소는 휴가를 내야 다 치울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을... 내 인생샷 속에는 내가 없고 허영, 허세, 허풍만 있었다. 내 인생샷은 나비의 꿈이었다.


온라인 쇼핑으로 옷을 사는 것 같은 삶을 살았다. 잘생긴 모델들이 조명까지 받으며 멋지게 찍은 착장 사진을 보고 옷을 사고, 막상 입어보고는 패완얼을 외치며 반품하는 그런 삶. 그래도 반품하기 귀찮아서 그냥 입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나마 지금이라도 반품해서 다행인가? 요즘은 사진을 찍을 때 못생기게 나와도 크게 웃는다. 팔자 주름에, 치열이 삐뚤빼뚤해도 자연스럽게 크게 웃는 모습이 진짜 나인 것 같다. 인생샷을 아직 못 건졌지만 사진 속으로 진짜 나를 자꾸 집어넣다 보면 언젠가는 건지겠지... 인생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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