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그렇다면 정신은 무엇이고 물질은 무엇인가?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나 : 첫 번째 질문부터 접근해 볼까요?
AI : 좋아요! 첫 번째 질문은 "세계는 정신과 물질로 나뉘는가? 만일 그렇다면 정신은 무엇이고 물질은 무엇인가?"였죠. 이 질문은 철학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주제입니다. 철학자들은 주로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이원론과 일원론.
◎ 이원론(Dualism) :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은 이원론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정신(혹은 영혼)과 물질(혹은 육체)이 별개의 실체라고 봤습니다.
- 정신 : 비물질적인 실체로, 생각, 감정, 의식 등을 포함합니다.
- 물질 : 물리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실체로, 모든 물리적 객체와 현상입니다.
◎ 일원론(Monism) :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들은 일원론을 지지했습니다. 이들은 정신과 물질이 본질적으로 같은 실체의 다른 표현이라고 봤습니다.
- 유물론(Materialism) : 모든 것이 물질적인 것으로, 정신도 물질의 산물이라고 보는 관점입니다.
- 관념론(Idealism) : 모든 것이 정신적인 것으로, 물질도 정신의 표현이라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와 같은 논의는 철학뿐만 아니라 심리학, 신경과학, 물리학 등 여러 학문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각 관점마다 고유의 논리와 근거가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답을 찾기는 어렵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다른 궁금한 점이 있을까요? �
나 : 그전에, 현상이나 물질이 실존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체... 즉 정신이 없다면 물질의 실존, 실체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죠?
AI :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이는 철학에서 특히 인식론(Epistemology) 분야에서 중요한 논의 주제입니다. 이 문제는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현실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몇 가지 관점을 소개할게요.
◎ 현상학적 관점 : 에드문트 후설 같은 철학자들은 현상학적 관점에서 물질세계를 이해했습니다. 현상학에서는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이 바로 실재라고 봅니다. 따라서 수용체인 정신없이 물질의 실존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버클리의 관념론 : 조지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는 물질이 실존하려면 누군가에 의해 지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수용체가 없다면, 물질의 실존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 객관적 실재론 : 반면, 객관적 실재론자들은 물질이 정신과 독립적으로 실존한다고 봅니다. 이는 물질이 독립된 존재로서 존재하고, 우리의 지각은 단지 그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이라는 관점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수용체가 없어도 물질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 양자 물리학과 현실 : 현대 물리학, 특히 양자 물리학에서도 이와 유사한 논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부 해석에서는 관찰자가 존재해야만 특정 상태가 확정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물리적 실재가 관찰에 의존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러한 논의는 우리가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는지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당신은 어느 관점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다른 관점이 더 흥미롭게 느껴지시나요? �
나 : 시간이라는 현상을 한번 생각해 보죠. 시간은 객관적 현실인가요? 주관적 경험인가요?
AI : 시간에 대한 관점도 매우 흥미로운 철학적, 과학적 논의 주제입니다. 시간의 객관성 또는 주관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 객관적 시간 : 과학적 관점에서 시간은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예를 들어, 뉴턴의 고전 물리학에서는 시간이 절대적이며, 공간과 독립적으로 흐르는 것으로 봤습니다. 이는 모든 사건이 동일한 시간축을 따라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도 시간은 객관적이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시간은 관찰자의 속도와 중력에 의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는 시간의 상대성을 설명하지만, 여전히 시간 자체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주관적 시간 : 반면, 철학적,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시간이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 경험은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으며, 이는 심리적 상태, 주의 집중, 나이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시간은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지루하거나 힘든 시간을 보낼 때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시간 경험이 주관적임을 시사합니다.
◎ 시간의 혼합 관점 : 또한, 일부 관점에서는 시간이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물리적으로 시간은 일정한 법칙을 따르지만, 개개인의 인식과 경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의 본질에 대한 논의는 철학, 과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각 분야마다 다른 해석과 이해가 있습니다. 당신은 시간에 대해 어떤 관점을 더 선호하거나 흥미롭게 생각하나요? �
나 : 객관적 시간에서도 상대성이 보이고, 주관적 시간도 상대성을 설명하는 것 같네요. 공통적으로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말씀이죠? 그럼 시간같이 상대적인 것들은 물질(현실)인가요? 정신(경험, 현상)인가요?
AI : 시간의 본질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물질과 정신 중 어느 한쪽으로 명확하게 분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관점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 물질적 관점 : 시간은 물리학적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특히 상대성 이론에 따라 시간은 공간과 함께 4차원 시공간의 일부분으로 간주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시간이 물질세계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간은 중력과 속도에 의해 영향을 받으므로 물질적 특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정신적 관점 : 시간은 우리의 인식과 경험에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시간이 어떻게 인식되는지가 주된 연구 주제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시간은 정신적 개념으로,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 혼합적 관점 : 물리적으로 시간은 물질세계의 법칙에 따라 작용하지만, 우리의 인식과 경험에 따라 주관적으로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는 시간은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복합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시간은 물질과 정신의 경계를 넘나드는 복합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본질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철학, 물리학, 심리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당신은 어느 관점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나 : 음... 복합적이라는 결론이군요. 객관적인 측정도구가 있다면 물질이지만, 내면(개인의 경험)에서는 정신이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AI : 네, 요약하자면 그렇습니다. 시간을 물질적이고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도구들이 있는 반면, 개인이 시간에 대한 경험은 매우 주관적입니다.
◎ 물질적 측면 : 시계나 타이머와 같은 물리적 도구로 시간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구들은 일정한 기준에 따라 시간을 정의하고,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합니다.
◎ 정신적 측면 : 시간에 대한 개인의 경험은 매우 주관적입니다. 예를 들어,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는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지루하거나 힘든 시간을 보낼 때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시간 경험이 개인의 정신 상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 관점을 통합해서 보면, 시간은 물질적 현실과 주관적 경험 모두에 영향을 받는 복합적인 개념입니다. 이렇게 복잡한 주제를 다루는 것은 철학적, 과학적, 심리적 논의를 더욱 깊게 만듭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고 싶은 부분이 있나요? �
나 : 객관적인 측정도구는 도량형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만...
AI : 맞습니다. 객관적인 측정을 위한 도구와 단위, 즉 도량형 시스템은 시간, 길이, 질량 등의 물리적 양을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러한 도구와 단위는 과학적이고 일관된 방법으로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제가 언급했던 주관적 시간 경험은 물리적 측정과는 별개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계가 1시간을 측정하는 동안, 개인의 경험은 그 1시간을 다르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의 인식, 감정, 상황 등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시간을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도량형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개개인이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은 여전히 주관적인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혹시 이 주제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부분이 있나요? �
나 : 그럼 물질은 여러 사람이 똑같이 측정하는 결과, 즉 객관화가 되었다는 말씀이죠? 측정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그렇다면 통계학 아닌가요? 측정자의 오류는 고려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이게 통계학에서 게이지 R&R이라고 하던가요?
AI : 네,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다. 여러 사람이나 여러 도구를 통해 동일한 결과가 나올 때, 우리는 그 측정값이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측정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측정과 통계적 방법론이 사용됩니다. 이러한 접근법은 오류를 최소화하고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통계학에서는 측정자와 측정 도구의 변동성을 평가하고, 신뢰성을 분석하는 방법론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게이지 R&R(Gauge Repeatability and Reproducibility)입니다.
게이지 R&R은 측정 시스템의 정확성과 반복성을 평가하는 통계적 기법입니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 Repeatability: 동일한 측정자가 동일한 조건에서 반복 측정할 때의 일관성.
- Reproducibility: 다른 측정자가 동일한 조건에서 측정할 때의 일관성.
게이지 R&R을 통해 측정 시스템의 총변동을 평가하고, 그 변동이 측정 도구, 측정자, 환경 조건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측정의 신뢰성을 높이고, 오류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측정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통계적 방법론을 활용하여 측정 시스템의 신뢰성을 평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추가적인 질문이나 더 알고 싶은 부분이 있으신가요? �
나 : 그럼 물질은 통계학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나요?
AI : 물질 자체를 통계학의 영역으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물질의 속성이나 특성을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해 통계학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통계학은 물질과 관련된 데이터를 수집, 분석,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 물질의 특성 분석 : 특정 물질의 밀도, 강도, 열전도성 등의 물리적 속성을 다수의 샘플을 통해 분석할 때, 통계적 방법론을 사용하여 평균값, 분산, 표준편차 등을 계산합니다.
◎ 측정 시스템 평가 : 앞서 언급한 게이지 R&R과 같은 통계적 기법을 통해 측정 시스템의 신뢰성과 반복성을 평가합니다.
◎ 품질 관리 : 제조업에서 생산된 제품의 품질을 통계적 샘플링과 분석을 통해 평가하고 관리합니다.
따라서 통계학은 물질의 속성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분석하며,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물질 그 자체는 여전히 물리학, 화학 등의 과학적 분야에서 주로 다루어집니다. 통계학은 이러한 과학적 연구를 보완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해가 되셨나요? 혹시 추가적인 질문이나 더 알고 싶은 부분이 있으신가요? �
나 : 결국 객관적인 물질이라는 것도 오차가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인간은 그 오차를 줄이고 줄여서 자연법칙이라는 것을 만들었고... 그러면 결국 자연법칙은 이것을 믿고 싶어 하는 인간 정신의 발현 아닐까요?
AI : 흥미로운 견해입니다. 물질에 대한 측정이 오차를 포함할 수 있다는 점과, 자연법칙이 인간의 정신적 발현이라는 견해는 철학적으로도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 측정의 오차 : 모든 측정에는 어느 정도의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오차는 측정 도구의 한계, 측정 환경, 측정자의 변동성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발생합니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오차를 최소화하기 위해 반복 측정, 교정, 통계적 분석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 자연법칙과 인간의 정신 : 자연법칙은 우리가 관찰하고 이해하는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규칙입니다. 이러한 법칙들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도출되며, 많은 경우 경험적 증거와 일관성을 바탕으로 합니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볼 때, 이러한 법칙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만든 정신적 모형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질서와 예측 가능성을 중시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 인간의 정신과 과학 : 과학적 탐구는 인간의 호기심과 이해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자연법칙을 믿고 따르는 것은 이러한 욕구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자연법칙도 인간의 인식과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정신적 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논의는 자연과 우리의 인식 사이의 관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게 합니다. 당신의 생각은 매우 흥미롭고, 철학적 토론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줍니다. 다른 주제나 더 깊이 탐구하고 싶은 부분이 있나요? �
나 : 이것은 네 번째 질문과도 연결됩니다.
AI : 네, 맞아요. 네 번째 질문은 "자연법칙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오직 질서에 대한 선천적 사랑 때문에 자연법칙을 믿게 되는가?"였습니다. 이 질문은 자연법칙의 본질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를 탐구하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빈 곳
러셀은, 현상이 분명히 있으나 과학적으로 설명이 어렵고, 그렇다고 신학으로 설명하자니 조금은 무책임한 영역을 연구하는 분야가 철학이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과학으로 증명이 될 때까지 임시로 '빈 곳'을 메우는 역할이라고 할까? 혹은 과학이 증명해야 할 가설을 제공하는 역할이라고 할까? 그래서 철학은, 신비주의보다는 선명하지만, 과학보다는 흐릿한 상(像)을 탐구한다고 할 수 있다. 허상(虛像)을 바라볼 수 있게끔 초점을 맞춰주는 역할이라고 하면 될까? 아니면 오차에 대한 완충 역할?
그런 철학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서양철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이 활동하던 시기와 그 이전 시기에는, 불교나 동양의 고대 신비주의와 비슷한 양상을 띤다. 오르페우스교와 디오니소스교가 바로 그것이다. 오르페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리라와 노래로 신과 지구상 모든 생명에게 사랑받았다는 음유시인이고, 그런 능력 덕분에 저승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찾으러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는 하데스의 경고를 어기고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디오니소스는 술(포도주), 풍요, 황홀경의 신(神)이다.
예술과 술, 알아듣기 쉽게 음주가무라고 할까? 이런 것들이 신앙의 대상인 종교로까지 발전했다는 것은, 이것을 매개로 영적인 세계와 교감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철학과 과학, 대중의 생각 속에 흔히 나타나는 정신과 물질의 구별은 종교에서 유래하고, 영혼과 육체를 구별하면서 시작되었다. 오르페우스교도는 자신을 땅과 빛나는 하늘의 자식이라고 선언한다. 육체는 땅에서 오고 영혼은 하늘에서 온다는 말이다.」*
이들은 영적인 경험과 윤회를 믿었고, 정신적인 일탈, 만족, 성취, 그리고 쾌락과 황홀경을 추구하는 것 못지않게, 고행이나 수행, 금욕주의 생활의 실천을 강조하기도 했다. 철학자는 노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불교의 탁발승 같은 생활을 주장하기도 한다. 아직 학습이 부족하여 정확한 년도를 통한 동서양의 역사 비교를 하진 못하지만, 불교가 발생하기 전, 인도에도 이와 비슷한 시류의 철학, 종교, 사상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조로아스터교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전생에서 쌓은 원죄를 씻기 위해, 인간은 현생에서 고행을 실천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방식이 상당히 가혹했다. 과거 서양에서 동양, 특히 인도하면 떠올리는 신비로운 이미지 혹은 고정관념 같은 기행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바늘 침대에 위에 맨살로 드러눕는다거나, 뜨거운 숯 위를 맨발로 걷는다거나, 피리를 불어 코브라를 조종하는 그런 사디스틱한 고행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런 비상식적 수행방식에 반기를 든 것이 바로 부다(Budda), 즉 불교다. 불교는 이런 고행을 버리고 조금 더 온건한 명상이나 윤리적인 삶을 지키며 사는 참선수행을 택한다. 불교는 나중에 동양철학을 공부하게 되면 다루기로 하고...
개인적 망상 수준이기는 하지만, 철학이라는 관념이 확립되기 전에는 이 분야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커다란 한 덩어리로 존재했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그 유명한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자라투스트라'가 바로 조로아스터의 페르시아식 표기라고 한다. '자라투스트라 = 조로아스터'라는 등식을 보면, 미시적인 디테일은 달라도, 문명의 발전을 거시적으로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할 수도 있었겠다는 추측을 해 본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만큼은 동서양이 팡게아 수준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가까웠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어쩌면 동서양의 차이는 '철학이 포지셔닝 한 빈 곳이 달라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즉,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지의 차이가 가장 큰 요인이지 않았을까?'라는 상상도 해본다.
99.99999...%를 100%라고 할 수 있는가?
서양철학은 크게 세 가지 흐름이 있다. 합리주의, 경험주의, 상대주의. 다소 유치하지만, 어린아이의 눈높이로 얘기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객관주의와 상대주의의 대결이었고, 이 대결에서 객관주의가 승리를 거둔 후, 객관주의가 다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로 나뉘어 대결을 하며 발전하게 된 형세다. 좀 유식한 척을 하자면, 합리주의와 경험주의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했다고 할까? 그리고 소피스트 이후 자취를 감췄던 상대주의는 훗날, 니체나 실존주의 철학으로 재등장한다.
'세계를 정신과 물질로 나누어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사적 관점으로 AI가 이원론과 일원론을 거론하는데, 이원론의 대표 학자 데카르트 (1596~1650)와 일원론의 대표 학자 스피노자(1632~1677)는 서양철학사에서 모두 합리주의 철학자로 분류된다. 철학의 연구 대상이 인간으로부터 벗어나 있던 중세의 암흑기가 지나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유명한 데카르트는 다시 인간 중심의 철학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합리주의 철학뿐만 아니라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수학과 자연과학의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며 근대철학의 시작을 알린다. 데카르트가 한참 주가를 올리던 시절, 물질과 정신을 따로 생각하는 그동안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의문을 품고 일원론을 주장한 철학자가 바로 '스피노자' 되시겠다.
'절대적인 진리가 있느냐 없느냐'하는 '빈 곳'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로 나뉘고, 다시 '이데아라고 하는 이상향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하는 '빈 곳'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로 나뉘었다. 그리고 계속 다시 그 안의 '빈 곳'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이원론과 일원론이 나뉘고, 유물론과 관념론이 나뉘고, 나뉘고, 나뉘고 또 나뉘었다. 어쩌면 그래서 요즘의 철학을 플라톤의 사상에 주석을 다는 수준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걸 보면, 왜 러셀이 분석철학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진리 탐구'라는 형이상학의 거대한 덩어리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 무엇인지 화학적으로 분석(analyse)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현재의 과학 수준으로는 전 성분 분석은 거의 불가능하고 보면 된다. 가능하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99.9%를 분석해 내도 성분 분석표에는 '<0.1%'라는 불순물 표시가 따라붙는다.
그래서 철학에는 아직 '빈 곳'이 많다. 사실 얼마나 비었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있다고만 하는 게 더 맞겠다. 철학이 '진리 탐구'라는 형이상학의 정체를 몇% 나 밝혀냈는지 절대 알 수 없다. 설령 99.999999% 진리에 도달했다 손 치더라도, 100%가 아니라면 0.000001%에 의해 나머지가 전부 무너질 수도 있다. 게다가 추가로 발견한 '빈 곳'의 정체도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는데, 밝혀졌다고 생각했던 곳이 상대주의처럼 부활해서 다시 돌아오기까지 한다.
서양철학 초기, 객관주의와 상대주의의 대결에서 소피스트들은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가 진리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하기도 했지만,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그 진리는 상대적이냐? 절대적이냐?'는 이 질문에 스스로 무너졌다. 그리고 나는 현재를 '에세이 범람의 시대'라고 규정하며, '상대주의 재림의 시대', '내로남불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철학은 끝나지 않는 무한 루프 속을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뱅글뱅글 어지럽게 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역사는 승자의 역사여서 그런지, 이후 한동안 객관주의는 선, 상대주의는 악... 그렇게 철학은 선과 악의 대결양상으로 펼쳐지며, 종교 철학으로 변질된다.
세계는 정신과 물질로 나뉘는가?
'삐-', 지금도 괴롭히고 있는 나만 들을 수 있는 소리, 이명. '병원을 가야 하나? 편두통 때문인가? 뇌 어디가 나쁜 거 아니야?' 걱정이 많아지던 중, 진실을 알게 되었다. 이명은 질병이 아니고 증상이다. 그것도 청신경이 나빠진 증상. 즉 난청으로 생기는 증상이라고 한다. 청신경 손상으로 소리가 비는 곳이 생기면 뇌는 이것을 보상하기 위해 이명 증상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래서 우선 난청이 생기지 않게끔 조심해야겠지만,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들린다고... 화면 속 의사는 마치 층간소음을 말하듯 이명을 설명했다. 상대주의다.
지금의 철학은 이런 과정을 겪는 듯하다. 2500년의 나이를 먹으며, 이제 철학은 고리타분하다고 여겨지는 시대... 그래서 철학의 결핍, 철학의 부재로 여기저기 잡음(이명)이 많아지는 시대... 그런 시대에 세계를 정신과 물질을 나누는 것은 '빈 곳'을 채우는 일일까? '빈 곳'을 만드는 일일까? 아니면 그저 현상유지 정도에 머무르는 일일까? 그리고 철학이 노환으로 오늘내일한다면 더 이상 아프지 않게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해야 할까? 전기충격기로 심폐소생술을 해야 할까? 아니면 식물인간이 되더라도 그냥 놔둬야 하는 걸까?
철학을, 물리학의 양자와 전자처럼, 쪼갤 수 없는 수준까지 파고들 것이 아니라면, 노화로 수명을 다하기 전에, 처음 수준으로 돌아가 객관주의, 상대주의 말고 다른 흐름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형이상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은 잘게 쪼개진 철학을 다시 하나의 진리로 연성해 줄 연금술이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그 '빈 곳'에는 철학을 황금으로 바꿔줄 현자의 돌이 간절한 듯하다.
철학이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쪼개지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화합물 상태에서의 작용 기전이나 대체물질, 유사물질을 더 세심히 연구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아마도 문명의 퇴보라고 비난받겠지? 그런데 역시 이런 고민을 먼저 한 사람이 있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인식론에 대한 대안적 접근*'. 하지만 아쉽게도 이 부분은 한참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왜냐면 아직 진도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너무 어렵다.
* '러셀 서양철학사, 제1권 고대 철학, 16. 플라톤의 영혼불멸설' 250p. 을유문화사 3판 6쇄
* 과정 철학 (Process Philosophy) :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가 창시한 철학. ‘고정 불변하는 실재(reality)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철학적 개념(또는 안목)만으로 이해되는 우주는 진정한 우주가 아니다’라며, 진리는 계속 변한다고 해서 본인 스스로는 유기체 철학이라고 불렀다. 그의 이런 사상은 저서 <과정과 실재, 1929>에 잘 나와있는데, 세계 4대 난서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버트런드 러셀과 <수학 원리>를 공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모든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이다’라는 말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