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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박영감 Dec 30. 2024

프롤로그 : 철학의 일

사변적 정신의 소유자가 흥미를 느낄 만한 문제

고민과 탐구의 시간


    시작은 소설의 구상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갖고 이세계(異世界)로 환생한 주인공이, 그곳에서 '철인왕(哲人王)' 후보가 되어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철인왕은 사변적(思辨的)*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겪는 사건은 철인왕으로 등극할 자격이 충분한지 판단할 만한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일', '쉽게 답을 내리면 안 되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윤리, 모순, 선택이나 희생이 강요되는 상황, 종교적, 사회적 죄악 등, 흔히 말하는 철학적 질문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러셀 서양철학사>였다.


    사실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역사, 발전사, 계보를 굉장히 싫어했다. 역사는 가장 명확한 문장구조인 6하원칙에서 '왜'가 빠진 채 서술(敍述)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사변적 정신을 소유한 나에게는 꼬리에 꼬리는 무는 '왜'가 필요했는데, 역사 교과서의 서사(敍事)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시험으로 역사는, 지문을 읽고 무슨 사건인지 답하는 등의 단편적인 사실을 묻거나, 혹은 발생한 순서대로 역사적 사건을 나열하는 등의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냥 외우고 시험이 끝나면 홀라당 잊어버렸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어릴 때는 집요하고 강박적인 성격도 한 몫해서, 의문이 생기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막힌 곳에 계속 머무르며 해소가 되어야 비로소 넘어갔다. 그러니 역사는 매우 지난하고 고된 과목이었다. 그래서 역사를 싫어했고, 포기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철학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뚜렷했다. '왜 그런 질문이...', '왜 그런 고민이...', '왜 그런 탐구가 시작되고 필요했는지...' 이유를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철학사를 공부해야 했다. 지금 이 글을 왜 쓰게 됐고,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이유를 밝히는 것처럼 말이다.


질문들...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의 저서 <러셀 서양철학사>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하려는 철학은 신학과 과학의 중간에 위치한다. 철학은 신학과 마찬가지로 명확한 지식으로 규정하거나 확정하기 힘든 문제와 씨름하는 사변적 측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철학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전통을 따르든 계시를 따르든 권위보다 인간의 이성에 호소한다. 명확한 지식(definite knowledge)은 무엇이든 과학에 속하는 반면, 명확한 지식을 초월한 교리는 모두 신학에 속한다. 신학과 과학 사이에 자리 잡고 양측의 공격에 노출된 채,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 이 무인지대(No Man's Land)가 바로 철학의 세계다. 사변적 정신의 소유자가 대체로 흥미를 느낄 만한 문제에 대해 과학은 거의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며, 신학자의 확신에 찬 대답도 이전 세기와 달리 확신을 주지 못하는 듯하다. (중략)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실험실을 뒤져 봐야 소용없는 노릇이다. 신학 분야에서는 이러한 모든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겠다고 공언했으나, 바로 명확성이야말로 근대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이 의혹을 품게 된 원인이었다. 정답이 없더라도, 앞서 열거한 질문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철학의 일이다.」


    그래서 서문에서 제시하는 9가지 철학 질문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 질문을 AI(Copilot)와 대화한 내용을 기반으로 써 내려가볼까 한다.


1. 세계는 정신과 물질로 나뉘는가? 만일 그렇다면 정신은 무엇이고 물질은 무엇인가?
2. 정신은 물질에 의존하는가, 아니면 독립된 힘을 가지는가?
3. 우주는 통일성 혹은 목적을 가지는가? 우주는 어떤 목표를 향해 서서히 진화하는가?
4. 자연법칙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오직 질서에 대한 선천적 사랑 때문에 자연법칙을 믿게 되는가?
5. 인간이란 천문학자의 눈에 보이듯 작고 전혀 중요하지 않은 행성 위로 무력하게 기어 다니는, 불순물이 섞인 탄소와 물로 구성된 조그마한 덩어리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으면 '햄릿'에 등장하는 고뇌에 찬 존재인가? 혹시 인간은 두 가지 면을 다 지닌 존재인가?
6. 고귀한 삶의 방식과 비천한 삶의 방식이 따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모든 삶의 방식이 다 헛된 것에 불과한가?
7. 만일 고귀한 삶의 방식이 있다면 무엇이 그러한 삶을 이루며, 우리는 어떻게 고귀한 삶을 성취하는가?
8. 선(善)은 진가를 드러내려면 영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우주가 엄연히 종말로 향해 가도 선이란 추구할 만한 것인가?
9. 지혜란 존재하는가, 아니면 지혜란 최고로 세련되게 포장된 어리석음에 불과한가?


AI에게 물어보다


    AI와의 대화를 선택한 이유는, 권위에 대한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이 분야가 전공도 아니고,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문외한 수준으로 대화를 하려면 AI가 적격이었다. 서투르고, 수준 낮고, 편협하고, 어이없는 질문에도 답답해하지 않고, 답 없는 얘기를 해도 화도 안 내면서 생각도 나눌 수 있는 대상...! 좀 씁쓸하지만, 아마 공부를 많이 해도 이만한 대화상대는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또 하나는, 지금 읽기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됐는데, 책이 너무 두껍다 보니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동기 부여가 필요했다. '뭐라도 남기면 기억에 좀 남겠지?'라는 생각도 작용했다. 음... 제대로 알려면 N회차는 읽어야 할 것 같다. 처음에 모르고 지나쳤던 것을 다시 읽을 때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제대로 철학사 공부 좀 해봐야지.


    AI에게 '세계는 정신과 물질로 나뉘는가? 만일 그렇다면 정신은 무엇이고 물질은 무엇인가?'를 첫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AI의 대답에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며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책을 읽으며 알게 된 내용도 추가해서, 결국은 9개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내용이 되었다. 중간중간 비약과 아집도 보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어떻냐? 저런 생각은 어떻냐?'며 서로 의견을 나누고, 같이 고민하는... 비난이 아닌 비판적 시각으로 대화하는 태도는, AI이지만 꼭 배워야 할 자세였다.


    AI에게 물어보면 우선 이렇게 정리해 준다.


 「흥미롭고 깊이 있는 질문들이네요! 철학적 사고를 통해 인간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은 정말 가치 있는 일입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주인공이 철인왕 후보로서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는 분명 흥미로울 것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 질문들은 모두 생각해 볼 만한 문제들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볼까요?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 이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에서 비롯된 질문입니다. 정신과 물질은 분리된 실체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모든 것이 물질에 의존하는 것일까요?  

    정신의 독립성: 정신이 물질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힘을 가진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뇌의 물리적 상태에 의해 결정될까요?  

    우주의 통일성과 목적: 우주가 하나의 통일된 목적을 가지고 진화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무작위적인 사건들의 결과일 뿐일까요?  

    자연법칙의 존재: 자연법칙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인식이 만들어낸 질서일 뿐일까요?  

    인간의 본질: 인간은 단순히 우주에서 작은 존재일까요? 아니면 고뇌하는 존재로서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둘 다를 포함할 수 있을까요?  

    삶의 고귀함과 비천함: 고귀한 삶의 방식과 비천한 삶의 방식이 따로 존재할까요? 아니면 모든 삶의 방식은 결국 헛된 것일까요?  

    고귀한 삶의 성취: 만약 고귀한 삶의 방식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까요? 어떤 가치와 행동이 고귀함을 이룰 수 있을까요?  

    영원한 선: 선이 진정한 가치를 가지려면 영원해야 할까요? 아니면 우주의 종말을 향해 가더라도 선은 여전히 추구할 만한 것일까요?  

    지혜의 본질: 지혜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가장 잘 포장된 어리석음에 불과할까요?  

이 질문들은 철학적 탐구의 좋은 출발점이 됩니다. 각 질문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고, 다양한 관점을 탐구하면서 철학적 사고를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질문부터 탐구해보고 싶으신가요? �」


    AI가 100% 정확하진 않다. 그리고 다소 건조한 대답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 보니 각 질문에 대한 내 생각, 그리고 수집한 자료를 보태서 한 질문, 한 질문 파고들어 볼까 한다. 머리는 좀 아프겠지만...


그럼 본격적으로 '러셀 서양철학사'의 9가지 질문에 대해 하나씩 생각해 보자.

* 사변적 (思辨的) 1. 명사, 경험에 의하지 않고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고 설명하는 것. 2. 관형사, 경험에 의하지 않고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고 설명하는.

*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 철학자, 수학자, 사회운동가, 교육자이자 노벨상 수상자. 영국 수상을 두 차례 지낸 자유주의적 정치가 존 러셀 경의 손자로 1872년 영국 웨일스에서 귀족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0년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에 입학하여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화이트헤드와 함께 페아노와 프레게의 수학 논리를 발전시켜 1910년에 대표작 <수학 원리>를 출간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세계에 영향을 줬을 뿐 아니라 분석철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논리학, 인식론, 존재론, 윤리학, 사회철학 등 철학 전반에 분석적 방법을 적용해 독창적 견해를 발표했고, 기호논리학도 확립했다. 1950년에 <러셀 서양철학사>, <인간 지식>, <결혼과 도덕>등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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