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 (4)
흔들리는 시선
남자친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문 중에 하나라죠. "오빠, 나 오늘 어디 바뀐데 없어?" 그러면 남자는 갑자기 시선이 흔들리고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한 모습으로 목소리까지 떨며 대답합니다. "어? 머... 머리... 앞머리 잘랐나? 아... 아닌가? 헤헤헤~." 요즘은 안 그런가요? 한 때 코미디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였는데... 한참이 지난 후에 알게 된 진실은, 사실 정답보다 남자친구가 나를 얼마큼 사랑하는지,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나에 대해 평소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아보는 애정도 테스트의 성격이 더 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는 노하우가 없지만, 남자들도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능글맞아지면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스킬이 늘어갑니다. 그래서 바람도 잘 피우는 걸까요? 옛날 이모나 숙모들이 모여서 수다 떨면서 남편들 (아빠, 삼촌, 이모부들이겠죠?) 흉보는 것을 몰래 엿들으면, 다 예전에 바람피운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합니다. 여자들은 그렇게 연대감을 쌓아가는 것 같더라고요. 남자들 군대 얘기로 친해지듯이...
봄을 맞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중학교 때 봄소풍 때 야심 차게 준비했던 노래가 '브금(BGM)'으로 전락하며 가사 까먹었던 일이 생각나고, 그래서 집안 인테리어와 함께 배경음악도 바꿔서 '중경삼림 OST'를 계속 듣다 보니, 그 당시 센세이셔널 했던 카메라 워킹이 떠오르더라고요. 불안한 세기말 홍콩의 감성과 젊음의 방황을 담기 위해 그렇게 흔들리는 카메라 워킹을 사용했다고 하던데, 배우들의 비주얼과 홍콩의 네온사인 풍경이 한 데 어우러져 '왕가위 스타일'이라는 고유명사 같은 장면을 만들어냈었죠.
증거 : 남겨진 것...
그리고 또 떠올랐습니다. 실제로 인간은 과거를 보고 산다는 말 들어보셨나요? 만약 우리의 시각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뇌로 영상을 전달한다면, 왕가위 스타일의 시각이 될 거라는... 우리의 시각은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과거의 형상을 저장해 놨다가, 다음으로 시선이 옮겨간 곳의 형상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안 그러면 멀미 나서 죽을지도 모른다네요. 우리의 시각은 눈동자가 움직이는 동안의 중간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만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좀 쉽게 이해하시겠죠? 얼마 전에 중세시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에 관한 철학적 고찰에 대해 쓴 적이 있는데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으면 알지만, 묻는 사람에게 설명하려면 모르게 되고 만다." 그는 여러 가지 난점에 부딪혀 당혹스러웠다. 그는 과거도 미래도 현실적으로 있지 않고, 현재만 현실적으로 있다고 말한다. 현재는 순간일 뿐이고, 시간은 오로지 지나가는 동안 측정될 따름이다. 그런데도 과거와 미래의 시간은 현실적으로 있다. 여기서 모순에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모순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과거와 미래는 현재로 생각될 따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과거'는 기억과 동일시하고, '미래'는 기대와 동일시할 수밖에 없으며, 기억과 기대는 둘 다 틀림없이 현재에 속한 사실들이다. 그는 세 가지 시간, 곧 '과거에 일어난 일의 현재,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일의 현재'가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 일어난 일의 현재는 기억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현재는 눈앞에 펼쳐지는 일이며, 미래에 일어날 일의 현재는 기대다." 세 가지 시간, 곧 과거와 현재, 미래가 있다는 말은 부정확한 어법이다.」
오늘 떠오른 생각으로는 좀 틀린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과거에 사는 것 같습니다.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시간은 현재밖에 존재하지 않는데, 인간은 과거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들어졌다가 더 맞겠네요. 인간은 그렇게 생겨먹었고, 그렇게 적응해 왔으니까요. 인간에게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웬만한 관찰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아셨죠? 누구나 다 그런 거예요. 나만 그런 게 아니에요. 누가 충고만 했다고 하면 전부 다 '현실을 살아라... 현실을 살아라...' 하는데... 안되니까 제가 부족하고 못나서 그런 거라고 자책하기 쉽잖아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겨먹었어요. 만약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흐흐흐
오늘 그 증거를 찾았네요. 봄맞이 옷장 정리를 하는데, 제 옷장 속은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증거로 남아있습니다. 분명히 어릴 때는 잘 맞았던 옷인데, 지금은 무릎 위로 올리기 어려운 바지, 반대로 열심히 돈 벌 때 늘어난 뱃살 때문에 허리띠로 겨우 연명하던 단추 떨어진 바지 (지금은 엉덩이가 너무 헐렁해서 버려야 할지 고민이에요. 나중에 살찌면 다시 입을 수 있지 않을까 고민 중입니다.) 겨우 내 잘 입고 이제는 옷장 깊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주어야 하는 두꺼운 옷들과 그 자리를 대신할 봄옷, 그리고 언젠가는 다이어트해서 꼭 입고 말 거야 다짐하며 샀는데 유행이 지나가버린 비싼 옷... 거기다 아직 배송 중인 새로 구입한 옷까지... 옷장은 그야말로 역사네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곳. 어쩌면 인생은 옷장 같은 것 아닐까요? 늘 입을 게 없는 옷장... 하지만 유행은 돌고 돈다니 지금은 좀 남루해도 잘 보관하면 다시 비상할 날이 올 겁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