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소리, 허튼소리, 쉰소리, 개소리, 엉터리
그럴 거면 여러 사람 괴롭게 하지 말고 나가!
다음 날 아침, 단장 입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말이다. 만 3개월을 채워가던 9월의 어느 날, 추석을 앞두고 있었고, 가을이면 여기저기서 시작하는 축제 준비로 마구마구 바빠지는 시기였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에 열리는 ‘바우덕이 축제’에 휴일근무조를 짜고, 그다음 주엔 안성 스타필드에서 열리는 ‘희망먹거리 나눔 축제’ 행사도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사전준비로 내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행사 당일 무거운 것을 차로 옮기거나 부스에서 방문객을 응대하며 몸으로 때우는 역할이었다.
그 사이, 이 조직·조직원·시스템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부단장이 의원면직됐다. (공무원 조직에서는 ‘자진퇴사’를 ‘의원면직’이라고 부른다. 자진퇴사도 '됐다'라는 피동형 술어를 써야 하나 싶다.) 부단장이 나가자 단장에게서 약간의 초조함이 감지됐다. 내년이면 사업이 끝나는데, 갑작스러운 인원 변동이 불안하기도 했을 거고,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가 눈에 띄지도 않았다.
대부분이 ‘진행 중’이었고, 지역 농협 조합장들과 시장과 함께 설악산으로 워크숍을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이것도 속사정을 보면 지방선거를 위시한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건 아닐까? 너무 의심의 눈초리로만 보고 있나?)
허튼소리
그날도 ‘주간업무보고’라는 파시즘적인 공개 자아비판 시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회의 말미에 단장이 나에게 그동안 부단장이 해오던 일을 전부 맡아서 해야 한다고 했다. 엥? 일단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단장은 책임감만 하나 가득 안기는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계속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대놓고 앞으로 내가 맡아서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역시 답을 피하고 역질문을 했다.
“부단장 후임자는 언제 뽑나요?"
그러자 그거랑 무슨 상관이냐며 그냥 무조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럴 능력도 없거니와 현재의 '임기제 시간제 계약직 마급'의 신분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즉 내 업무가 아니라고 말했다. 지금 하고 있는 경로당꾸러미만으로도 벅차다고 말했다. 그러자 단장이 샤우팅을 시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 일을 하라고 당신을 뽑은 건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꾸러미는 우리 사업도 아니고 이걸 하라고 뽑은 거다."
다시 분명히 말했다. 그러면 계약서에 내 업무라고 명시되어 있다 하더라도 ‘혼자만 하라’는 뜻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실 지난번 빌런들과의 회의에서, 나와 부단장이 경로당꾸러미 사업을 공공급식팀에게 다시 돌려주자고 했을 때,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꼭 쥐고 안 놓아준 사람이 단장 아니던가? 농가조직화의 중요한 사업이라며, 그리고 똥파리들을 인적 자원이라며 치켜세워줬던 인물이 단장 아닌가?
단장은 더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일장연설을 너머, 말한 대로만 되면 세상이 좋아진다는 것을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알 수 있는 ‘옳은 말’ 대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한 10분 정도 지났으려나? 지쳤는지, 나를 제외한 다른 참석자들에게 큰 소리를 내서 미안하다며 회의를 마치자고 했다. 그리고 나한테는 내일까지 생각을 해오라고 했다.
'何(NA... NANI?!) Wh… What?! 도대체 뭘?’
우리는 이런 것을 두고 심리학 전문용어로 ‘허튼소리(개소리)’, 영어로는 ‘Bullshit’이라고 한다.
이건 애들 장난이야
단장의 심리학적 허튼소리는 머리에서 싹 지우고 심기일전해서 다음 경로당꾸러미 구성품과 관련해서 농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원래 9 to 6 상근이 아닌 단장은 좀 늦게 출근한다. 그는 출근하자마자 내 옆으로 와서 얘기를 좀 하자고 했다. 무슨 소리를 할지 뻔하고, 별로 들을 것도 없을 것 같아서 지금은 통화 중이니 조금 있다가 방으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훗 그런데 그럴 것 없단다 그냥 여기서 기다릴 테니 통화 마치고 오란다.
'뭐~! 그러시던지'
통화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다른 팀원들이 모두 있는데서 대화가 시작됐다. 단장의 첫마디는
"그래서, 어떻게, 잘 생각해 보셨어?"
라는 말이었다. 아! 그러니까 도대체 뭘 생각하라는 거야? '네네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합습죠.' 뭐 이런 걸 바라는 건가? 내가 미쳤어? 우리 엄마 표현대로면, 내가 골 비었나? 내가 약 먹었나? 나는 꾹 참고 최대한 공손하게 하지만 날을 살려 역질문을 했다.
"단장님은 어떻게... 생각해 보셨어요?"
"아니 내가 생각할 게 뭐 있어? 박주무관이 생각해 봐야지?"
"저야말로 생각해 볼게 뭐 있어요? 그렇게는 못한다고 했잖아요? 부단장님을 새로 뽑기 전까지 당분간 혼자서 좀 해달라고 부탁해도 할까 말까 한 판에, 그런 것도 아니고 사람은 언제 뽑을지, 아니 뽑을지 말지도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혼자서 하라고 하면 못한다니까요?"
"아니 그럼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당신은 이 일을 하러 온 거라니까? 꾸러미 같은... 애들 장난 같은 일을 하러 온 게 아니라..."
엥? 애들 장난?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그는 분명 '애들 장난 같은 일'이라고 했다.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끊었다.
"애들 장난 같은 월급을 주니까 저는 애들 장난밖에 못하겠네요."
"아니 나 원 참! 참 이상한 사람이네... 여기가 무슨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안 하고 그런 덴 줄 알아?"
엥? 뭐? 하고 싶은 일만 한다고? '개소리' 총집합 버라이어티 쇼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사람을 이렇게 혹사시켜 놓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고? 단장은 꾸러미는 애들 장난 같은 일이라며 실무자의 노동을 폄하했고, 하고 싶은 일만 하냐며 존엄을 무시했다. 말 섞어봐야 내 입만 아프겠다 싶어서 그냥 입을 닫았다. 단장은 점점 더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같이 있기 싫어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럼 뭘 하고 싶은데?"
단장의 샤우팅이 파티션을 넘어왔다. 음... 이건 주제를 넘어도 한 참 넘었다. 그야말로 막말 대잔치. '이것 뭐에요? 노망, 틀딱, 미친 늙은이...'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건 대꾸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스스로 발작버튼을 눌렀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데요?"
"그럴 거면 여러 사람 괴롭게 하지 말고 나가!"
사실 별로 아쉬울 게 없는 일이었다. 이미 빌런들과 조우했을 때부터 그만 둘 생각이었다. 다만 연말까지 6개월을 채우고 고용보험을 타먹을까 라는 약간의 '이속 챙기기'가 떠올랐을 뿐이다.
Analysis
'그럴 거면 여러 사람 괴롭게 하지 말고 나가!' 이 말에는 오류가 많다.
먼저 단장의 말은 마치 내가 조직을 괴롭히는 존재인 것처럼 몰아가지만,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구조적 왜곡이 숨어 있다.
1. 괴롭힘의 주체가 뒤바뀌었다.
내가 괴롭힌 게 아니라, 조직이 나를 괴롭혔다. 애들 장난 같은 월급 (부족한 보상 : 신분의 제약, 주변관계의 얽힘, 그리고 무엇보다 책임감), 휴일 없이 연장되는 업무(나중에 대체 휴무나 수당으로 보상이 되기는 한다), 책임은 넘기고 권한은 주지 않는 구조. → 괴롭힘의 주체는 조직이다.
2. ‘나가라’는 말은 책임 회피의 언어다.
“그럴 거면 나가라”는 말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문제를 제거하려는 태도다. 그야말로 언어폭력이다. 조직은 불편한 질문을 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로 규정하고 제거하려 한다.
3. ‘여러 사람’이라는 말은 방패막이다.
“여러 사람”이라는 말은 책임을 분산시키는 장치다. 실은 단장 자신의 불안과 무능을 ‘여러 사람’이라는 익명성 뒤에 숨긴 것이다.
4. ‘전략 없는 희망’의 허위성
이 조직은 희망을 말하지만 전략은 없다. 그래서 뭐라도 해보고 망하면 '방치', 성공하면 '업적'이 된다. 사실 민원인들도 한 몫한다. 소수의 목소리 큰 민원인들의 희망사항이라는 점이 문제다. 희망은 말로만 존재하고, 실무자는 갈아 넣어져야만 굴러간다. '희망먹거리나눔'이라는 행사 명칭이 허위성을 상징한다.
5. 무엇보다 그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다.
단장은 위촉직이다. 9 to 6 상근자도 아니다. 결재권도 없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인사권이 없다. 그런데 늘공들은 단장의 의견을 묻고, 그의 의견에 따른다. 그야말로 공무원 자신들이 책임지기 싫어서, 잘못되면 조상탓 하려는 꼼수로 밖에 안 보인다.
사의를 표명하다.
그만두기로 마음먹고 늘공 팀장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하지만 인사위원회가 열릴 때까지는 나와야 한다고 했다. (나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대신 앞으로의 일은 민원인들에게 약속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자리만 지키겠다고 했다.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처음 맞은 꾸러미 작업.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잡았지. 비가 오고, 양도 많고... 나중에 전해 들은 말로는, 나 혼자 하던 일을 공공급식팀 전부가 나가서 하기로 했다고 한다. 음... 이 정도면 누가 '여러 사람'을 괴롭힌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