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세례

by 숨듣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갈라지고 피부방울이 피어난다. 한낱 어리석은 말들을 뱉고 나서야, 사지가 찢기고 나서야 인간은 제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게 되며, 피갑칠되어 종양인지 뭔지 모를 피부방울들이 찢어진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애써 낙천적인 척 콧방귀 뀌고 넘기려고 한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이란 없는 듯 행동하는 어린아이로의 역행에 다를 바 없다. 점점 더 커져 살이 오른 방울은 자신을 집어삼키며, 그 자리를 우두커니 지키고 있던 존재란 어디로 종적을 감췄는지 알 수도 없게 나인 양 행동하게 될지도 모를 테다. 저주처럼 여길 텐가? 그렇다면 그 또한 어리석은 말을 내뱉는 것이며, 또 다른 균열의 시작이다.


청년은 무늬 없이 단조로운 천장만 지켜보고 있다. 다시 바보 같은 생각에 잠긴다. ’오로지 가벼운 실수로써만 꽃이 탄생한다. 영혼은 굴하지 않는 열정으로 꽃을 이고 날아가며, 지나간 자리에는 새로운 희망들이 피어난다.‘ 청년은 단조로운 천장무늬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우주를 가로질러 희미하게 내리는 빗방울 소리를 상상하며 천천히 황홀경에 빠져든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얼마나 많은 실수의 축복이, 어리석고 바보 같았던 행동의 계시가 그를 찾아왔는지 새삼 깨닫는다.


스스로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던 것은 두어 달 전이었다. 이상하리만큼 모든 게 바보처럼, 또 한편 낯설게 느껴졌다. 길거리에 이상하리만큼 밝게 빛나는 네온사인들, 고장난지 어연 3주는 지난 것 같은 가로등을 무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여독이 가시지도 않은 채 다시 술잔을 잡고 미련 없이 제 과거를 들이키며 향락을 벌이는 청년들, 어디서 온지도 모를 차들이 어딘지 모를 도착지를 향해 가는 풍경, 현대 테크놀로지를 일말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며 제 몸에 건강기능식품을 털어 넣는 노인네들까지. 단 한 번이라도 내 일상의 광경을 의심해 본 적이 있던가?


그저 한 때의 감성이겠거니, 하고 넘기려던 호기심은 진정한 의심으로 번져 한참 동안 청년을 괴롭혔다. ’또 이상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네’라며 진부하게 현대인을 괴롭히는 모종의 불만이리라 생각하고 넘기려 했다. 그래도 의심은 쌓여만 갔다.


바보 같다고 생각하기로 한 대상은 일상의 재료들로, 특히 구원을 찾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으로 점점 확장해 나아갔다. 오지 않을 예수를 기다리며 교회에서 방언기도를 하는 저 여인은, 정말 예수가 오기를 기대하는 건가? 예수는 오지 않는다, 그래서 여인은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자신을 살려달라며 애원하고 울부짖을 수 있으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불행마저 악마 탓을 할 수 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현실에 그 서사가 약속한 종말이 도래하지 않는 구도 내에서야 진정 구원을 찾아내는 게 아닌가?


조용히 손님을 실어 나르며 제 영혼의 침전을 느껴도 될 택시기사들은 대체 그러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대체로 손님에게 말을 건네지 못해 안달 나 있었다. 단순히 짜증을 넘어 무엇이 그토록 택시기사라는 직업군의 사람들을 사로잡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그들이 소진할 주요 이야깃거리는 정치였는데, 그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결정으로 일관하는지는 구태여 손님에게 역설하지 않아도 다들 알 터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카세트 플레이어처럼 했던 말을, 새로운 손님이 택시에 구속될 때마다 반복하여 설파하였고, 대체로 그 결론은 예전 국가지도자들이나 민주투사들을 현시대에 소환하는데 이르렀다. 하지만 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생업에 목 메어 현대사회의 거버넌스를 진심으로 고민해 본 적 없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어디선가 들었던 말들을 되풀이하여 인용하며 설교자 행세를 하는 것은 아닌가.


사무실에서 단축키를 두들기며 제 실력에 한껏 취한 젊은 팀장은 무엇을 위해 회사와 컴퓨터의 노예를 자처하는가. 그는 아마 어린 시절 칭찬받은 행동을 되풀이하는 어린아이일 테고, 고전적 행동주의 실험의 대표적 선례일지 모른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그를 칭찬해주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다. 무심한 과장은 대표와 놀아나기 바쁜 와중에 이직을 생각하는 중인데, 젊은 팀장이란 분명 과거 직장에서, 혹은 그 이전 어디선가 겪었을 이미지를 되풀이하며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예컨대 부모로부터 평생 칭찬이라고는 들어본 적 없는 그가, 변변치 않은 대학도 졸업하고서 운 좋게 구한 일자리에서 예기치 못하게 사수로부터 칭찬 세례를 듣고 노예의 은사를 발견했다던가, 하는 식의 스토리 말이다. 아니면 도리어 칭찬을 아끼지 않던 부모와 아이의 이자 구도를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 서사를 회복시켜 자신을 아이의 위치에 가져다 두기 위해 저토록 열심히 타자기를 두들기며 흥분의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에게 구원이란 옛날옛적 겪었을 기억 어딘가에서 찾을 수 있는 무엇이다.


청년의 오만한 의심은 이토록 남의 삶을 재단하며 평가하는 데 있었으나, 그가 의심으로부터, 또 그런 평가로부터 얻을 유익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리어 혼란스럽기만 하여 나날이 우울해져 가는 영혼을 달랠 길 없이, 그는 평일이고 주말이고 더 이상 기계적으로 일을 할 때가 아니면 집에서 나오는 법이 없어졌다.


침대에 몸을 눕힌 어느 주말, 납처럼 무거운 공기가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청년은 이따금 답답하게 고인 한숨만을 신음처럼 내뱉고 있었을 뿐, 특별한 계획도, 찾아올 사람도 없이 생각에만 잠겨있다. 대체 무엇이 그를 그토록 괴롭게 만드는지 이토록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괴로웠다. 마치 유년기 시절부터 쌓아두었던 숙제더미가 창고에서 떠밀려 나와 자신을 깔아뭉개는 듯한 느낌이었다.


껌딱지처럼 바닥에 눌어붙은 등을 힘겹게 일으키면서 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청년은 화장실로 향한다. 너저분하게 정리조차 안 되어 면도기고, 샴푸고 할 것 없이 욕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은 청년의 영혼을 비추는 듯하다. 청년은 거울을 바라본다. 거울 속의 남자는 곧 시비라도 걸 듯이 잔뜩 불만 서린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았다. 남자의 얼굴을 알아차리자마자 청년은 다시 풀이 죽어 안면근육에 힘이 풀린다. 그러자 거울 속 남자도 무언가 상실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청년은 거울 속 남자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다. 욕실의 축축한 공기가 가슴을 조여왔다. 몇 번이고 심호흡을 시도했지만, 공기는 폐 속 깊이 들어오기를 거부했다. 그는 흐트러진 바닥 위에서 비누 조각 하나를 주워 들고 손 안에서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비누는 얇고 투명하게 닳아 있었다. 그저 존재만으로 무언가를 닳게 만드는 일상이라는 시간의 압박을 떠올렸다.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았을 뿐인데, 어느샌가 한창 활기 넘칠 나이의 육신과 달리 치아도 다 빠져버려 제 혼자 음식을 처리할 재주도 없는 노파의 영혼이 되어 있었다. 이대로 살다간 회춘은커녕, 육신도 곧 영혼의 나이를 따라잡을 제논의 레이스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는 비누를 욕조 쪽으로 던지고 턱을 괴며 앉아버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자세가 기이할 정도로 편안했다. 머릿속에는 이름 모를 질문들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미친 망아지처럼 생각들이 날뛰다가 이내 한 지점으로 탁 모여 하나의 형체를 이루었는데, 그마저도 추상적이기에 그지없었다.


‘이대로 살다 죽는 게 나쁜 건가?’


수십 번은 되뇌었던 의문이었다. 그런데도 답은 여전히 낯설고 무겁게 다가왔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욕조의 물꼭지를 틀었다. 물이 빠르게 차오르는 소리가 무거운 침묵을 깨며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물을 손으로 휘저으며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문득 욕조의 거품이 부서지는 모양새에서 자신을 보았다. 순간적인 존재감, 그리고 뒤이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모습일지도 몰랐다. 그는 어렸을 적 어디선가 들었을 음성을 되뇌었다. 먼지에서 왔으니 먼지로 돌아가라는 말.


청년은 음성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미친 여자의, 얼굴을 긴 머리털로 반쯤 가린 채 귀신과 같은 몰골로 하고서 응어리진 제 속내를 거침없이 쏟아내는 모습을 상상한다.


“참으로 보잘것없구나. 그러니 진부한 인용구로 네 존재에 안식을 가져다주려고 하는 거지. 너는 네 하찮은 의심들이 대단한 철학이라도 되기라도 하는 양 착각을 하는구나. 너 갖고 있는 질문, 네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 길거리의 행인들과 사무실의 동료들도 다 하는 질문이지. 하지만 그들은 구태여 바보 같은 재료로 스스로를 고문하지 않아. 왜냐고? 말 그대로 바보 같잖아. 그들은 현명해지기 위해 바보 같은 질문을 애써 모른 척하는 것이지. 근데 넌? 그 바보 같은 질문을 붙들고 현자 행세를 하다니! 골방에 틀어박혀 머리를 쥐어짜기라도 하면 뭔가 나오기라도 하는 것이야? 자, 한 번 괴롭혀봐! 너 자신을 더욱 고문해 봐! 네 살갗을 도려내는 고행을 겪더라도 바보 같은 답 말고는 할 수 없을 테니 말이야.”


방금 상상한 그 여인은 무엇일까. ‘왜 나는 그 여인을 상상했는가?’ 그 여인이 청년에게 건네는 말이란 참으로 뼈가 있다. 바보 같은 의심, 바보 같은 현자 행세. 나는 바보다. 바보, 바보, 바보, 바보!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신을 공격하던 중에 다시 거울이 보였다. 아까 그 여인이 거울에 비추었다. 놀랄 겨를도 없이 청년은 거울 속 여인을 향해 외친다.


“대체 내게 뭘 바라는 거야! 난 그냥 궁금할 뿐이라고. 사람이라면, 어떤 단어의 조합이라도 던져볼 수 있는 거잖아. 결과물이 아무리 바보 같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볼 뿐인데 대체 왜, 이런 걸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는 거지?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말만 해야 하는 건가, 나는..?”


갈수록 말에 확신을 잃어가던 청년은 말끝을 흐렸다. 여인은 더욱 기가 살아 기괴하게 웃으며 청년을 조용히 질타한다.


“네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용서가 안 되는 거지?”


힘껏 고개를 가로젓는다. 상상으로 그려낸 이미지를 현실에 불러와서는 청년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청년은 한참을 생각에 잠긴 듯 대답하지 않고 욕실 바닥타일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혹시나 여인이 침묵에 싫증 내며 떠나갈 거라 기대하는 것인지, 욕실 전등에 혹시나 빛이 비치어 여인의 모습이 나타나진 않을까, 제 시야를 양팔로 감싸 꽁꽁 싸맨다.


청년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것도, 저것도 싫었다. 어리석고 싶지 않았다. 바보 같지 않고 싶었다. 아마도 그게 다였다.


그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물기로 흐릿해진 거울 속 남자는 이젠 더 이상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흐릿한 형체는 무언가를 내려놓은 사람처럼, 그저 조용히 서 있었다.


청년은 욕실에서 나와 책상 서랍을 뒤적였다. 서랍 안에는 언젠가 무심코 던져두었던 낡은 편지지와 펜이 들어 있었다. 청년은 편지지를 꺼내 천천히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글씨는 날카롭고 굳은 다짐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부드럽고 느슨하게 풀렸다. “나는 나로 살았다. 그리고 나로 떠난다.” 짧지만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문장이었다. 그는 펜을 내려놓고 편지지를 접어 테이블 위에 두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들이 지나가고, 가로등이 점멸하며,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저마다 자신만의 무게를 짊어진 채 걸어가는 모습들이 문득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그는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적어도 걷고 있지 않은가.’


방의 불을 껐다. 어두운 방 안, 창문 밖의 희미한 불빛이 방 한가운데로 스며들었다. 그는 욕조로 돌아가 물속으로 천천히 몸을 담갔다. 차가운 물이 피부를 스치며 올라올 때, 그는 그 모든 무게를 비로소 내려놓은 듯했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있던 청년은 고요히 눈을 감았다. 손목에선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마치 깊은 잠에 빠져드는 듯한 평온한 얼굴이었다. 욕조의 물은 천천히 넘쳐흘렀고, 바닥을 적시며 무언의 말을 속삭이듯 욕실을 침묵으로 덮었다.


눈앞이 흐릿해진다. 청년은 어지러운 듯 고개를 휘휘 젓다가 이내 눈앞의 풍경이 점멸한다.


퀴즈쇼가 진행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2층짜리 대형 강당에 모여들었고, 청년이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이 동창들과 직장 동료들이었다.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당을 내려다본다. 자신보다 3-4줄 앞에는 어머니가 앉아있었다. 어쩐 일인지 둘은 서로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고 강당 무대만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퀴즈쇼의 무대는 화려하게 빛났다. 네온 조명 아래 진행자는 환한 미소로 관객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자, 자! 여러분 모두 준비되셨나요?" 그의 목소리는 마이크를 타고 강당을 울렸다. 청년은 자리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무대를 응시했다.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진행자는 계속 말했다. "이번 퀴즈쇼는 특별합니다! 참가자는 단 한 명뿐이며, 그 주인공은…" 진행자가 말을 끊고 긴장을 유도하며 드라마틱하게 관객석을 스캔했다. 관객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퍼졌다. 청년은 어색하게 몸을 움츠렸다.


"바로 저기!" 진행자가 청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순간 강당의 모든 시선이 청년에게 쏠렸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경멸, 기대, 비웃음 같은 수많은 감정들이 엿보였다. 청년은 뒤늦게 고개를 흔들며 부정하려 했지만, 이미 그의 주변에 조명이 집중되며 무대 위로 끌려가는 듯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서 나오시죠! 방해 말고, 잔말 말고, 얼른얼른 나오시라니까!”


청년은 사람들의 등살에 떠밀려 어느새인가 무대 위에 서있었다. 어머니를 바라본다. 어머니는 그저 동경의 눈길로, 마치 이 무대에 서보는 게 한없는 꿈이었다는 듯이 청년을 쳐다볼 뿐, 그에게는 어떤 관심도 주지 않는 듯했다.


강제로 무대에 오른 청년은 진행자 옆에 서게 되었다. "이름이 뭐죠?" 진행자가 물었다.

"저… 저는…" 청년은 우물쭈물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괜찮아요!" 진행자가 청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다독였다. "긴장하지 마세요. 오늘의 퀴즈쇼는 당신의 삶을 완전히 바꿀 기회입니다!"


청중들은 환호했지만, 청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진행자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 게임의 이름은 <당신의 삶을 재구성하라!>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당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심지어 미래까지 돌아볼 겁니다. 당신의 모든 선택과 그 결과를 평가할 거예요. 준비됐나요?"


"아니요, 준비되지 않았어요!" 청년이 급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묻혀버렸다. 진행자는 그를 무시하고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자, 00 씨! 당신은 삶에서 가장 후회했던 순간을 꼽아본 적 있나요?"


그의 질문에 강당은 숨죽였다. 청년은 머리가 하얘졌다. 눈앞에 어머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가 했던 수많은 어리석은 선택들과 스스로를 학대했던 날들이 얽히고설켰다.


"저는…"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후회가 많습니다.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진행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그게 바로 게임의 시작입니다. 당신의 후회는 결코 당신만의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느끼는 감정이죠. 그렇다면 이번 질문입니다. 당신은 그 후회들을 바꿀 기회가 생긴다면, 무엇을 바꾸겠습니까?"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번엔 무대가 아닌 객석 어딘가에서 그녀가 고요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엔 어떤 분노도, 실망도 없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다.


"… 아마도 아무것도요." 청년은 조용히 말했다. "모든 걸 바꾸고 싶었지만… 후회가 없다고는 말 못 하지만… 바꾸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의 대답에 강당은 고요해졌다. 잠시 후, 진행자가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좋아요! 멋진 대답이에요! 그런데… 진정 당신이 그렇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말일뿐인가요?"


진행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년은 울음이 터졌다. 강당에 앉아있는 모두가 침묵을 유지하는 와중에 청년의 어머니는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못 봐주겠다는 듯이, 그녀는 벌떡 일어나 청년을 향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대체, 네놈의 새끼는 어릴 때부터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그렇게 울부짖기라도 하면 누가 와서 돌봐주랴? 네 똥 닦으랴, 하릴없이 뒷바라지하랴, 고생했던 내 처지가 한스럽기에 짝이 없구나. 너 같은 걸 누가 거둬주겠니? 응? 말해보렴, 너 따위 버러지를, 어떤 성인이 구한다는 거야?”


청년을 강당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울다가 그 말을 듣자 울음을 그치고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청년도 자리에서 일어나 강당 무대를 뺑뺑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마치 다 죽어가던 기계에 충전기라도 꼽은 것처럼, 청년은 우울한 기색은 싹 감추고 넘치는 생동감을 견디지 못하고 날뛰었다.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고, 몇 바퀴고 풍차를 돌면서 청년은 강당에 모인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외쳤다.


“이야-멋지다 우리 어머니! 역시 최고다, 최고! 당신 같은 어머니만 있다면, 세상 모든 아들들은 욕을 삼키고 살아갈 테야! 아마도 삶의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주겠지. 좋아요 어머니, 아주 훌륭하셔! 그렇게 아들 머리 위에서 평생을 짖어달란 말이야!”


방청객들은 이 풍경이 웃겨 죽겠다는 듯이 깔깔대며 웃었다. 어머니는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방방 뛴다.


“그래, 평생 짖어주마, 너의 충실한 개새끼가 되어주마! 어디 그 꺼질 기미조차 없는 분노로 날 삼켜보든가! 네 어머니는 평생 네 위에 군림할 테니까!”


말이 끝나자 강당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대와 객석, 어머니는 청년의 뒤편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고 온전한 어둠이 가라앉았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청년은, 앞을 더듬지만, 애써 무언갈 잡기 위해 허둥대는 제 팔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머리가 칼이 쑤시는 듯 아팠다.


곧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욕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찬물이 얼굴을 적시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욕조의 물은 넘치지 않았고, 손목엔 피 한 방울 없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숨을 몰아쉬었다.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더 이상 흐릿한 형체도, 상상 속 여인의 모습도 없었다. 그저 피곤한 눈동자를 가진 자신만이 비쳤다.


청년은 문득 테이블 위의 편지지가 생각나 방으로 걸어갔다. 편지지는 접힌 채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펜으로 적었던 글자는 사라져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말을 적은 적이 없었다. 편지지 한가운데 단지 성경이 한 구절만이 적혀있었다.


"마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는 한동안 편지지를 쥔 손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불 필요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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