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철 사례를 다루기 전에 | 이론편(2)
라깡은 반복을 단순히 어떤 사건이나 행위가 시간 속에서 되풀이되는 걸로 보지 않는다. 반복은 겉으로는 마치 같은 게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늘 어긋남을 동반한다. 중요한 건, 이 어긋남이 단순한 실수나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라깡에게 반복은 기표 체계가 감당하지 못하는 구조 내부의 비대칭, 그러니까 기표망이 미처 포섭하지 못한 간극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며, 따라서 반복이란 단순한 기표의 재현이기보다는 기표가 붙잡지 못하고 남겨둔 어떤 자리에 생기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라깡의 반복 개념은 프로이트가 임상에서 관찰했던 반복강박을 구조적이고 상징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은 반복된다고 느끼지만, 사실 반복하는 건 '같은 것'이 아니라 절대 같을 수 없는 차이 그 자체다. 따라서 반복은 기표가 기표가 놓치는 실재의 흔적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나 순환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순환은 구조가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지만, 라깡이 말하는 반복은 구조 내부의 균열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반복은 전체 시스템을 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시스템이 감당하지 못한 결손과 틈을 표면 위로 드러내며, 과거에 결코 말해지지 않았던 잔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롭게 출현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출현은, 말 그대로 '사건'이다. 구조화되지 않았던 것이 귀환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라깡이 말하는 '실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외부 세계의 물질적 현실이 아니다. 실재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상징화될 수 없으며, 상징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어떤 과잉의 차원이다. 기표 체계가 결코 포섭할 수 없는 잉여. 그 잉여는 언제나 말의 실패, 의미의 파열, 이해할 수 없는 어긋남으로 나타난다. 반복이 벌어지는 지점은 바로 이 실재가 무대 위로 튀어나오는 통로다. 실재는 주체의 말 속에는 없지만, 그 말이 깨지고 혼란스러워지고 고통스러워질 때, 그 틈 사이에 어김없이 스며든다.
또한 실재는 (현상학적 맥락을 배제하고서 말해보자면) 외부의 위협보다는 주체 내부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다. 주체는 언어를 통해 자신을 구성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무언가는 말해지지 않은 채로 남게 되며, 그 말 바깥으로 밀려난 것이 바로 실재다. 이 실재가 반복을 유발하는 잠재적 원인이 된다.
따라서 반복은 실재와의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기표 체계의 파산이다. 이 파산은 주체의 의식을 정지시키거나, 논리를 왜곡시키며, 때로는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주체는 이 반복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저 그것을 다시 겪고 있다는 사실만 인지할 뿐이며, 그 무력한 인지가 반복의 고통을 구성한다. 실재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결핍의 형태로 돌아오기에, 반복은 실패한 상징화를 계속해서 반복하게 만든다.
한편 반복은 단지 무력한 순환의 반복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가 자기 동일성의 환상에서 탈락하고 실재와의 틈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방식이다. 주체는 그 반복 속에서 자아정체성(je)을 다시 구성하려 애쓰지만 언제나 실패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실패는 단지 부정으로만 남지 않고, 주체가 윤리적 위치로 진입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그 자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의 무게, 책임질 수 없는 욕망의 도래와 접촉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그 감지, 실패의 체험은 윤리적 결단의 전제가 된다.
이하의 해석은 필자의 사적 개입이 다소 섞여 있으나,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라깡에게 있어 윤리는 선과 악이라는 이항 대립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윤리는 도덕적 규범을 따르는 문제라기보다, 주체가 자신의 욕망의 진실을 어떻게 직면하고 책임지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여기서 욕망은 단순한 바람이나 희망의 수준이 아니라, 기표의 구조 속에서 형성되었으나, 주체가 결코 전면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요청이며, 구조 자체이다.
윤리는 바로 그 욕망을 밀어붙이는가, 아니면 도달을 미루는가의 결단의 지점에서 출현한다. 이 결단은 단순히 의지나 용기의 문제는 아니다. 이는 실재의 차원에서 주체가 어떤 불가능성과 접촉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묻는 물음이다. 주체가 반복하는 고통은, 실재의 요구를 회피할수록 더욱 심화된다. 그는 욕망의 자리에서 도망치거나, 타자의 기대 속에 스스로를 축소시킬 때, 반복은 보다 파괴적인 방식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만약 그가 반복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반복이 자신에게 지시하는 어떤 것에 귀 기울이기 위해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다면, 윤리는 그곳에서 발생한다.
이때의 윤리는 구원의 약속도, 결과에 대한 보상도 담보하지 않는다. 이는 단지 주체가 도래한 욕망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수용의 태도에 놓여 있다. 정신분석적 테크닉—이를 '욕망을 다루는 기술'이라 부를 수 있다면—은 충족 불가능한 욕망의 구조를 인정하고, 그 결핍을 감내하며 반복에 대한 책임을 자임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충실성은 종종 비윤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타인의 시선을 거슬러 사회의 규범을 위반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실성이란 고결함이나 성숙함이라기보다는, 말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연한 태도일 뿐이다.
반복을 단순히 실패한 상징화의 흔적으로 간주하는 해석은, 주체를 영원한 결핍의 피해자로 고정시킬 위험을 동반한다. 그러나 라깡에게 반복은 단순한 고통의 되풀이가 아니다. 반복이란 주체가 감당하지 못한 진실이, 말해지지 않은 채, 또 다른 형식으로 도래하는 장면이다. 이 반복이 주체에게 의미를 직접적으로 제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그것을 감지하고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감당의 순간에서 윤리는 발생한다. 반복은 그 말할 수 없음과 맺는 관계의 방식 자체가 주체의 윤리적 책임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반복은─정신분석이 정치적 영역으로 확장되지 못한다는 비판에 일단 굴종하는 태도로서 말해보자면─정신분석의 영역을 넘어선다. 반복은 정치철학적 사유의 문을 두드리는 개념으로 확장된다. 바디우가 말했듯, 사건은 기존 질서의 틈에서 발생하며, 반복은 그 틈의 선행 징후로 작동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