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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Mar 13. 2024

가장 도전적인 1년을 보내자

3. 현실의 벽 너머로



"글쎄, 확실한 건 앞으로 내가 다시 직장생활 할 일은 없다는 거야."




필요 이상으로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굳세고 심지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그래서 일 그만두고 뭐 할 건데?" 하고 물어 온 상대가 예상했던 답은 아닐 지 모른다. 결국 네가 생각이 다 있겠지, 하며 상대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 차례 시선을 아래로 보낸다.




"그리고 당장은 아내랑 유럽에 다녀 오려고. 한 오 개월 쯤. 다음 주에 출국해."




뜨악한 표정을 채 다 가리지 못한 얼굴에 놀란 기색이 뒤섞인다. 퇴사 소식을 알린 상대 열이면 열 비슷한 반응이다. 그럴 만하다. 어느 무엇도 만 서른 셋 기혼자가 할 만한 일반적인 선택이 아니다.






이리 된 김에, 우리 인생에서 가장 도전적인 1년을 보내 보자. 나와 아내는 이렇게 '결의'했다. 퇴사를 기점으로 1년이라는 시간이 우리 부부에게 주어졌다. 조금 긴 유럽행을 위해, 다니던 대학원에 아내가 1년짜리 휴학계를 냈기 때문이다. 학칙상 한 학기만 건너뛸 수는 없어 내린 결정이다.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태도로 인생을 살아온 체 했다. 낱낱이 들여다 보면 실상 그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아 온 듯하다. 정말로 하고 싶던, 혹은 해야만 한다 생각한 것을 간절히 붙들고 열정을 쏟아부어 본 일이 얼마나 될까. 대개는 겉핥기에 그쳤다. 어딘가에 미쳐 있고 그런 나를 주변이 인정해 주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데 그치는, 흔해 빠진 몽상가에 가까웠다.


이제는 본격적인 모험을 해 보고 싶었다. 월급쟁이 삶이 내 길이 아니라는 걸 명확히 알았으니 여태 품어 왔던 어설픈 꿈에 하나씩 도전해 보기로 했다. 아내 역시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대해 그만의 목마름이 있어 도전하는 삶에 대한 나의 뜻에 동조하여 주었다.


첫 행보는 유럽 배낭 여행이다. 관광 위주가 아니라 체류와 경험에 방점을 둔 일종의 실험적 여정에 가깝다. 나와 아내는 서울, 수도권, 나아가 한국을 벗어나 사는 삶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줄곧 나눠 왔다. 현지 체류는 공상의 영역 밖 현실적인 모습과 다양한 가능성을 몸소 가늠해 볼 기회다.


나와 아내 모두 유럽 대륙을 밟는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오래 전 각자 두 달 이상 유럽에 머물러 본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 같은 계절이었다. 서로의 존재도 모르던 때였지만 같은 낯선 대륙 위에서 각자의 해방감을 누렸다.


모든 게 좋았던 그 때, 우리 둘 모두 아쉬웠던 한 가지가 있었다. 이 멋진 곳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지 않았다는 것. 이번 계획에는 그 때 찾지 못했던 빈 조각을 채워 완벽한 그림을 만들고자 하는 바람을 담기도 했다. 여행에 결국 낭만이 빠질 수는 없다.






평일 아침. 집을 나선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 역으로 향한다. 오전이라 사람이 적지 않다. 플랫폼에 자리를 잡고 가만히 선다. 스크린도어에 반사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 같았다면 출근도 전에 퇴근만을 고대하는 불만 가득하고 사회성 부족한 회사원의 얼굴이 비춰지는 자리다.


그 대신 등 위로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배낭을 멘 들뜬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출근 인파에 섞여 반팔과 청바지 차림으로 아내와 함께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삶이 막막해질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히려 내 삶은 한층 더 명쾌해졌다. 다만 해야 할 일과 생각할 일이 전보다 훨씬 많아졌을 뿐이다.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만큼 인생을 주체적으로 조율하며 최대한 내 입맛에 맞게 살아갈 수 있다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코로나19 이후로 오랜만에 방문하는 인천공항이 반갑다. 캐리어 대신 배낭을 김장봉투로 꽁꽁 싸매 부친다. 캐리어 없이 배낭만으로 여행해 본 일은 국내외를 통틀어 처음 해 보는 경험이다. 도착지에서 배낭을 온전한 모습으로 받아들 수 있기를 기도한다. 아무렴 설레는 일이다. '안 맞는 일 그만두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떠나는 유럽 배낭 여행'. 한 문장 안에 설렘 포인트가 몇 개인지.


출국장으로 넘어가 공항 내부를 활보한다. 배가 고파 잠깐 식당에 들른 새 탑승 시간이 가까워진다. 티켓을 몇 번이고 확인한다. 탑승 게이트가 몇 번이더라, 아내 손을 붙들고 바삐 서두른다. 빨리, 빨리. 정신없이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귀국 티켓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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