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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Mar 06. 2024

불안

3. 현실의 벽 너머로

오전 아홉 시 반. 침대에서 기어나와 거실 커튼을 홱 걷어젖힌다. 창밖을 보며 기지개를 쭈욱 켠다. 하품이 반사적으로 나온다. 멀리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진 북한산이 희끄무레해 보인다. 미세먼지가 많은 날이다.


눌리고 기름진 머리를 쓸어올린다. 안경을 찾아 쓴다. 아스팔트 도로를 가만 내려다본다. 차량이 줄지어 끊임없이 오간다. 뜬금없게도 헌혈을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팔뚝에 꽂힌 바늘에서 출발하여 쭉쭉 플라스틱 관을 타고 이동하는 피를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다.


신호에 맞춰 오고가는 차들의 흐름이 어딘가에서 뽑아 올려 흐르는 혈류처럼 보인다. 각 하나의 혈구가 흘러가고픈 대로 흘러가는지 저도 모르는 힘에 의해 빨려들어가는지는 모른다. 어느 쪽이든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싱싱한 피다. 저들은 나와 다르다. 이 나라를 바로서게 만드는 주역이라는, 은퇴한 노인네나 할 법한 생각을 한다.





예상대로 퇴사에 따른 단물은 아주 금세 빠졌다. 고양감이든 흥분감이든 진폭이 큰 감정은 지속력이 짧다. 열 살짜리 어린 아이의 장난감 취향과 비슷하다. 몇 번 재미를 보면 빠르게 식는다. 삶의 지면을 올록볼록 요동치게 만들었던 감정이 어디론가 사라지면 남은 빈 자리에는 어김없이 불안이 들어찬다.


퇴사는 분명 나에게 좋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머리에 있고 불안은 가슴에 있다. 내가 옳은 결정을 내렸다는 확신과는 별개다. 골목길마다 숨어 나를 지켜보는 불량배 내지는 괴물과 같다. 항상 어두컴컴한 저편에서 뻘건 눈을 번뜩이며 아가리를 쩍 벌리고 이쪽을 바라본다.


불안은 내면에 자리한 현실의 벽이다. 부모를 설득하는 일이나 재정상황 같은, 외부에 있는 현실의 벽과 성질이 조금 다르다. 최대한 합리적인 계획을 짜고 방책을 세워 타파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별안간 우악스럽게 막무가내로 밀고들어와 속을 헤집어 놓는다.


동요하게 만드는 방식도 건달과 비슷하다. 자괴감과 낮은 자기효능감, 우울감 등 불량한 친구들을 잔뜩 대동하여 별 이유 없이 괴롭혀 온다. 한 번 사로잡히면 쉽게 떨치기 어렵다. 어설픈 행동으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단단한 아귀 힘이 멱살을 더욱 파고든다.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여 겁박한다. “너, 멋대로 까불다가 인생 망해.”





인생이 망한다. 이보다 더 확실하고 무서운 협박이 없다. 어쩌면 사실은 망하지 않기 위해 살아온 것과 다름없다. 행복하기 위해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마음보다는, 저기 저 형편없는 패배자처럼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겠다, 최소한 이정도는 하고 살아야겠다 하는 생각이 바투 와닿지 않는가. 희망보다는 두려움이 인생을 쉽게 조종한다.


‘그렇게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서’ 하는 선택을 여럿 해 왔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면 인생 망한다길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교회 꼬박꼬박 나오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고 지옥 간다길래 교회에서 거의 살았다. 한창 공부할 시기에 연애하면 인생 망한다길래 이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호기심에 죄책감을 덧씌웠다.


대학을 안 가거나 지방대를 가면 인생 망한다길래 서울 안의 대학을 꾸역꾸역 들어갔다. 졸업학점평균이 3.0도 못 되면 취업 못하고 망한다길래 3.5를 딱 맞췄다. 그래놓고도 '망하는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하게 될까봐 늘 전전긍긍했다.


두려움이 완성한 길 위에서, 문득 주변을 살폈다. 나처럼 사는 사람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부지기수로 많았다. 모두 제 나름대로의 부침은 있어 보였다. 그런데 딱히 인생이 망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망한 인생이란 무얼까. 고민 끝 결론은 '모른다'였다. 남이 손가락질하며 저, 저 봐라. 망했네. 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음, 나는 망했군. 인정하고 남루한 행색으로 길바닥에서 술이나 퍼 먹다 객사하는 노숙자 행세로 전락할 리가 없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어떤 삶을 살든 저 스스로 망했다 여기면 망한 인생이고, 성공했다 여기면 성공한 인생이 아닌가.





사색을 통해 끊임없이 불안의 벽 너머로 월담을 시도한다. 남들 보기에 천둥벌거숭이처럼 멋대로 뻗대며 사는 것 같아도 마음 속으로 부단히 바쁘다. 벽을 넘어서지 못하면 영영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다.


찬찬히 돌아보면 크고 작은 불안감을 전혀 느끼지 않고 살아온 시기가 없다. 다 그 때에 맞게 불안했다. 어릴 때는 막연히 부모가 나를 버리면 어쩌지 불안했고, 혹시라도 전학을 가게 되어 친구들이랑 헤어지면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불안했다.


중학생 되기 직전에는 선배들이나 일진들한테 얻어맞으면 어쩌지,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성적 못 내면, 대학 못 가면 어쩌지, 대학생 때는 연애 계속 못 하면 어쩌지, 군대는 어떻게 하지, 진로를 어떻게 하지, 늘 각양각색으로 불안했다.


차라리 불안을 인정해 버리기로 한다. 불안과 싸우기보다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너 개 쎄다. 나 너 못 이겨. 그러니까 그냥 친구해. 같이 가자. 뗄 수 없는 혹이라면 받아들여야 마음이 편하다. 나는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다. 불안은 당연한 것이다. 아마 죽기 전까지 나는 불안해 마땅하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해 나가면서도, 애를 낳아도, 돈을 더 벌게 되어도, 지금 품고 있는 꿈을 이뤄낸다 해도 나는 종국에 불안할 것이다.


보통의 인간답게 나는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다른 도리가 없다. '불안한 인생과 망한 인생은 별개'라는 경구를 열혈 신도처럼 무지성으로 붙들고 살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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