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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Feb 28. 2024

지극히 주관적인 퇴사의 이점

3. 현실의 벽 너머로

일을 그만둔다고 인생이 곧바로 망하지는 않는다. 일 없으면 없는 대로 삶에 소소한 이점이 생긴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1. 사랑받는 남편이 된다


백수가 아내에게 더 사랑받기 쉽다. 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은 몸과 마음에 여유가 보통 없다. 퇴근 후에 무엇도 하기 싫어한다. 아내가 같이 뭘 하고 싶다 하면 핑계부터 대게 된다.


어디 놀러 가자 해도 피곤하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해도 피곤하다, 오붓한 시간을 보내자고 해도 피곤하다 일관할 뿐이다. “아 나 야근하고 왔잖아…” 항상 준비된 변명이 있다.


어찌저찌 아내가 원하는 걸 하게 되더라도 못마땅한 기색이 드러나고야 만다. 언제 마음껏 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만 골몰한다.


게다가 늘 예민하여 아내가 조금만 건드려도 짜증스러운 반응이 반사적으로 튀어나간다. 부드럽게 다가온 말을 버릇처럼 뭉툭하게 받아친다. 일 다닐 때 나의 상태 역시 축 쳐져 무기력하거나 예민하거나, 딱 둘 중 하나였다. 제발 나를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아내에게 나는 한동안 별로 예쁜 구석이 없는 배우자였다.


내가 도로 사랑스러운 남편이 된 것은 전적으로 퇴사 덕이다. 마음에 얹힌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뒤로 말과 행동에 독기가 쏙 빠졌다. 행복하게 해 주겠답시고 결혼해서는, 돈 나올 구멍을 제 고집 따라 틀어막아 버린 데 대한 사죄의 의미가 깔려 있기도 하다.


분위기 좋은 카페 가서 디저트 먹고 싶다는 아내의 말에 더 이상 얼굴을 전만큼 많이 찌푸리지 않는다. "응 그래, 먹고 싶으면 먹어야지." 예쁜 말로 반응하는 법을 배웠다. 장족의 발전이다. 백수가 되면 아내의 의견과 요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일 여유가 생긴다.




2. 햇볕을 쬐며 살 수 있다


일 없는 사람은 내리쬐는 한낮의 햇볕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해를 보는 삶은 중요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볕의 중요성을 안다. 집을 구할 때도 창을 통해 해가 적절히 드나 안 드나를 따진다. 일조량은 중대사안이다.


해가 어느 정도로 드느냐에 따라 집값이 오르내리기도 한다. 일조권 침해, 일조권 소송이라는 용어가 나온 배경 역시 궤가 같다. 최소한더러 실내에서라도 '햇빛을 보고 살 권리'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니 이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그런데 평범한 사무직 직장인의 삶을 산다면, 하루 중 머리 위로 떨어지는 햇볕을 여유롭게 쬘 시간을 누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일조권이 완벽히 박탈된 삶을 산다. 일개미의 어두운 일상을 비추는 유일한 빛은 차갑고 무심하게 내리꽂히는 사무실 형광등 불빛 뿐이다.


반지하만이 아니라, 해가 오래 안 들면 사람 마음 한 구석도 음습해져 곰팡이가 피기 마련이다. 해를 받아야 마음마저 뽀송해진다. 과중한 책무를 벗어던진 자유로운 백수가 되면 볕 아래 흐물하게 녹아내린 길고양이처럼 노곤노곤 몸이 풀리는 기운을 원할 때마다 자유롭게 만끽할 수 있다.




3. 평일 특수를 누릴 수 있다


인기 맛집, 유명한 곳을 찾을 때 기다리거나 줄 설 필요가 전혀 없다. 요새 ‘핫’한 곳은 어딜 가나 대기가 길다. 주말 피크타임이라면 몇 시간이고 기다릴 생각으로 찾아가야 한다. 그런데 일 하는 사람이 겨우 낼 수 있는 시간은 애석하게도 주말과 공휴일 뿐이다.


주말은 직장인 입장에서 한 주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 유일한 기회다. 그럼에도 즐길 만한 곳에는 늘 박터지게 사람이 많아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고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차라도 끌고 가면 주차 문제니 뭐니 개고생이다. 나의 휴일은 모두의 휴일이라 버겁다.


은행 업무를 볼 때나 관공서에 방문해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반차를 쓸지 연차를 쓸지, 점심을 거르고 다녀올지 어느 쪽이든 작으나마 손해를 감수하는 계획을 짜야만 한다.


하지만 퇴사한 신분이라면 모든 걱정에서 해방이다. 어딜 가든 프리패스다. 널널한 시간만 쏙쏙 골라 다닌다. 유명 맛집에서 대기 없이 식사하고, 북적이지 않는 ‘핫플’에 방문할 수 있다. 관공서는 갈 필요가 생기면 아무 때나 간다.


차를 몰고 이동하더라도 부담이 없다. 막히지 않는 시간대를 잘 이용해 뻥 뚫린 도로를 유유히 누비는 재미가 쏠쏠하다. 평일 특수는 백수만의 특권이다. 삶의 질 곡선을 수직상향하게 만드는 주요한 이점으로 작용한다.




4. 주변에 대리만족을 준다


주변 월급쟁이 지인들에게 대리만족을 준다. 누구나 제 일에 불만을 갖고 산다. 한 번도 퇴사할 마음을 품어보지 않은 직장인이란 없다. 그렇다고 시원하게 때려치기란 누군들 쉽지 않다. 나 같은 유형은 그런 이들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이제 신혼인데다 갓 진급해서 연봉도 올랐는데 일을 그만둔다라. 보통은 쉽지 않다. 그 뒤 곧바로 아내와 동행하는 넉 달짜리 유럽여행을 계획하는 일 역시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좋게 말해 과감하고 나쁘게 말하면 무모한 선택을, 주변 지인들은 ‘부럽다’, ‘나도 그래 보고 싶다’는 말로 치장하여 준다.


부러워할 사안이 아닌 데다, 말은 그리 해도 실은 전혀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렇지만 저들이 곧죽어도 안 할 만한 선택은 맞기에, 주변 몇몇에 대리만족을 줬다는 뿌듯한 기분으로 지낼 수 있다.




5. 아이가 갖고 싶어진다


백수가 되면 오히려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한창 바쁘게 일을 할 때는 금전적으로 여유로울지언정 아이를 가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정신 없고 힘든 상황에 출산과 아이는 짐이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둘이 사는 것만으로도 빠듯하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퇴사 후에는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일상에 여유가 찾아와 아내와의 사이도 더욱 돈독해진다. 덕분에 인생을 더욱 멀리 내다보게 된다. 삶의 닻을 어디에 내리고 돛을 어떤 방향으로 펼쳐 어느 모로 나아갈지에 대해 찬찬히 함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나와 사랑하는 아내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생겨난다.


또, 일을 관둔 사실을 알면 주변 누구도 아이 생각 없냐는 말이나 아이 낳으라는 소리를 않는다. 잘 생각해 보면 좋은 기회다. 출산에 대해 어떠한 사회적 압박과 강요 없이 온전히 당사자만의 의사로 출산 계획을 해볼 수 있는, 인생에 몇 없는 타이밍인 것이다. 밖으로부터의 압박에 오염되지 않은 출산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일을 그만두고 나서야 비로소 품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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