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잠이 보약이었다. 어제만 해도 온몸이 산산조각 난 것 같았는데, 자고 나니 고통이 한결 덜했다. 통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간밤의 수준만큼은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내도 괜찮아 보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물어보았다. 오늘 자전거 탈 수 있겠냐고. 못 탈 것 같으면 지금 이야기하라고.
“그건 왜 물어봐?” 아침부터 말 한마디 없던 아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전거 못 탈 것 같으면, 자전거 수거해 가라고 사장한테 전화하려고.”
“자전거 빌린 돈은 어떻게 하고? 예약한 숙소는 어떻게 하고?”
“손해는 좀 보겠지. 그건 어쩔 수 없지 뭐”
아내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던 걸까?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아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자전거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빨리 출발 안 하고 뭐해? 부지런히 가야 오늘 모슬포까지 가지.” 씩씩한 아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갑자기 아침이 상쾌해졌다. 없던 힘도 불끈 솟아난다. 다시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아침 먹는 것도 건너뛰고, 부지런히 달린 이유는 하나였다. 당근케이크를 먹기 위해서였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 모슬포는 잊은 지 오래였다.
이른 아침인데도, 케이크 가게는 열려 있었다. 상상했던 것과 달리 작은 가게 규모에 깜짝 놀랐다. 당근케이크도 몇 조각 남아 있지 않았다. 규모가 작다고 우습게 볼 건 아니었다. 제주 사시는 아주머니가 제주 당근으로 만든 케이크였다. 내공이 있는 케이크였다. 가끔 생각날 것 같은 맛이었다. 실제로 살면서 이 당근 케이크가 그리웠던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망설이다가 한 조각 더 못 먹은 걸 못내 후회하곤 했다.
달릴수록, 통증 지수는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바다가 위로해줬다. 제주 바다를 곁에 두고서, 제주 바다를 바라보면서, 제주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호사스러운 일이었다. 육체적인 고통이 시각적인 쾌락만으로 치유되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혼자만의 기적도 아니었다. 묵묵히 나를 뒤따라오던 아내도 나처럼 제주 바다를 보며 달리고 있었다. 바다를 보고서 미소 짓고 있었다. 종종 나를 보고 미소 짓기도 했다.
평지가 오랫동안 이어졌지만, 마음껏 속력을 낼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자전거를 멈추게 되었다. 힘들어서 멈춘 게 아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사진을 찍으면 풍경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훔칠 수 있다고 착각했다. 카메라에 모든 순간을 다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제주를 담기에 내가 가진 카메라는 너무 작았다. 내 마음은 턱없이 작았다.
천천히 달렸는데, 어느새 모슬포에 와있었다. 부리나케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동네 마실을 나갔다. 몇 년 전에 보았던 몹쓸포가 아니었다. 쓸쓸함만 가득했던 모슬포가 아니었다. 도착하기 전에는,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서 아무거나 먹으려고 했는데, 도착 후에 마음이 바뀌었다. 가장 손님 많은 식당에 들어가서, 가장 인기 많을 것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둘이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을 거라는 주인장의 충고를 가볍게 무시하고 갈치조림을 주문했다. 너무 배가 고파서 고래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래처럼 큼지막한 갈치조림이 나왔다. 주인장의 말처럼 먹어도 먹어도 갈치조림이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도 악착같이 먹었다. 내일은 더 힘든 날이 될 것 같은 예감 때문인지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