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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 로마의 주인은 금수저?

카사 로마의 주인 헨리 펠라트를 마주하다

by muum

늦은 밤. 내일은 뭘 할까 궁리하다가, 토론토 관광청 웹사이트까지 흘러 들어갔다. 여행 중 막막할 때마다 나타나는 버릇이다. 우연히 카사 로마(Casa Loma)라는 곳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소개되어 있었다.


1900년대 초에 도시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지어져서 “언덕 위의 집”으로 알려진 카사 로마는 98개의 객실을 보유한 성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시설들이 돋보이는 건축가의 꿈이기도 합니다. 100년 세월의 고성 지하로 난 어둡고, 축축하고, 구불구불한 터널을 직접 체험해보십시오. 미로 같은 비밀 통로를 돌아다니는 유령들과 마주칠지도 모릅니다.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중세 모험의 세계입니다.


몇몇 단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98개의 객실. 100년 세월의 고성. 비밀 통로. 그리고 유령. 흥미롭다. 유령이라는 판타지 요소까지 집어넣은 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눈길은 끌었지만, 카사 로마를 꼭 봐야겠다는 욕심까지 생긴 건 아니었다. 아직 검색창에 카사 로마를 집어넣기 전이었으니까. 검색을 통해 더 알아낸 건, 단 한 사람의 욕망과 재력으로 카사 로마가 지어졌다는 점, 살아생전에 그가 망했다는 점이었다. 자수성가도 흥미로운데, 패가망신까지 했다니.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내일은 토론토에서 제일 잘 나갔던 부잣집 구경 갈까?" 넌지시 아내를 찔러봤는데, 반응이 없었다. 들은 체 만 체 했다. 또 무슨 허풍을 치려고 저러실까? 그녀의 무관심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토론토에 아는 부자라도 있으신가 봐요?" 침묵을 깨고, 드디어 그녀가 관심을 보였다. 아내의 빈정이 싫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아내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헨리 펠라트(Henry Pellatt)라는 사람이 살았던 카사 로마라는 곳인데, 방이 자그마치 100개나 있데. 유령이 나온다는 말도 있어. 어때?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빈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부랴부랴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내의 눈이 살짝 빛나기 시작했다. 카사 로마에 대한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DSC08048.jpg 카사 로마 입구

다음 날. 작정하고 아내와 함께 카사 로마를 찾아갔다. 관람시간은 오전 9:30부터 오후 5시까지. 입장료는 성인 기준 24달러였다. 미리 알고 왔지만, 선뜻 꺼내기 힘든 액수였다. 망한 부잣집 한 번 들여다보는 대가 치고는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위로가 된 것은,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제공된다는 점이었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찾는 덕분일 것이다.


입장하기 전까지, 카사 로마가 볼만한 가치가 있는지 고민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솔직히 답변을 하자면, 우리는 ‘후회를 하게 되더라도 해보고 하자' 쪽에 더 가까운 편이다. 죽기 전에 ‘해봤던 것을 후회’하는 것보다는 ‘못해본 것을 후회'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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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할 때,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오디오 가이드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한국어가 적혀 있는 오디오 가이드 사용법 1장과 기기를 내주었다. 투박하게 생긴 아날로그 기기였다. 당장이라도 버튼을 누르면 전화기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원하는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누르니, 오디오 안내가 흘러나왔다.


기쁨도 잠시뿐. 한국인 여성 목소리인데, 억양이 영 적응이 안됐다.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발음은 또박또박 정확한데, 다 듣고 나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한국어로 말하고 있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이한 경험이었다.


DSC07818.jpg 한 때 나마 카사로마의 주인이었던 헨리 펠라트


헨리 펠라트는 23살에 부모한테 사업을 물려받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금수저라고는 할 수 없었다. 본격적으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게 사업을 물려받고 난 뒤였으니까. 사업을 운영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부를 쌓기 시작했다.

그가 막대한 부를 모으게 된 건 전기 덕분이었다. 토마스 에디슨이 한참 활약할 당시, 헨리 펠라트는 전기공급사업이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확한 판단이었다. 1883년에 전기조명회사를 설립해서, 토론토 시에 가로등 독점 공급을 했으니까.

아버지가 사업에서 은퇴한 후에는, 더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태평양 철도와 노스웨스트 랜트사의 주식을 구입한다. 그의 예감은 또 한 번 적중했다. 이번에는 주식으로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그 후로 그는 거칠게 없었다. 광산, 토지, 보험, 전기 등 21개 회사의 회장 자리에 오를 정도로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1902년에는 나이아가라 폭포의 수력발전소 건설권까지 따낸다. 이후부터는 탄탄대로였다. 1911년 기준으로 그의 재산은 자그마치 1700만 달러나 되었다.


그는 돈 버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았다. 못지않게 쓰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부터, 건축가 레녹스를 통해서 꿈꾸던 성을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했다. 1911년에 짓기 시작한 성은 3년에 걸쳐 완성된다. 건설 당시 투입된 인원만 300명, 투입된 비용은 350만 달러나 되었다. 그 성이 바로 카사 로마였다.

불행하게도, 성에서의 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다. 카사 로마가 지어진 이후부터 그의 인생은 본격적인 내리막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는 바로 전쟁이었다.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끝 모를 경기침체가 이어졌다. 동시에 그의 사업도 기울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시에서는 카사 로마에 막대한 세금까지 부과한다.

1924년. 부동산 투자의 후유증과 세금의 압박을 끝내 견디지 못한 그의 가족은 결국 카사 로마를 떠나게 된다. 졸지에 빈집이 되어버린 카사 로마는 고급 호텔로 변신을 시도하지만 계획은 완벽하게 실패한다.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카사로마는 주인 없이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다시 문을 연 건 1937년. 새 주인은 토론토시였다. 이후로 지금까지 카사 로마는 관광명소로만 운영되었다.


알고 보니, 카사 로마도 헨리 펠라트가 붙인 이름이 아니었다. 그의 가족이 떠난 뒤, 땅주인이 붙인 이름이었다.

애초부터 그는 카사로마의 진짜 주인이 될 운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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