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정리, 50일 차

죽은 척했던 시계의 고백

by mu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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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안에 있는 시침이 지금까지 몇 바퀴를 돌았는지 아세요? 자그마치 5200바퀴를 넘게 돌았어요. 말이 5200바퀴지, 상상도 안 가는 숫자죠. 무슨 일이 있어도 10000바퀴는 넘기고 싶었는데, 헤어져야 한다니 참 아쉽네요. 시곗바늘들은 아직도 기운이 넘쳐 나는데 말이에요.


아! 물론 알고 있어요. 제 스스로의 힘으로 시곗바늘을 돌리는 게 아니라 것쯤은 말이죠. 그동안 제가 숨을 멈춘 게 모두 몇 번이었죠? 4번이요? 그렇게나 많이 제가 숨을 멈췄었나요?


그중에서도 처음 숨을 멈췄던 날 말이에요. 그 날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갑자기 모든 게 순식간에 멈춰 버렸거든요. 어! 어! 이게 뭐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제 심장이 뛰지 않더라고요. 내 시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건가?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못했는데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구나. 그런 생각은 아예 할 겨를조차도 없었죠.


모든 것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갑자기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거예요. 누군가 저를 다시 살려 낸 거죠.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 아세요? 그 짧은 순간에, 다시는 제게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언제 어떻게 다시 제가 멈출지 모르잖아요. 어쨌든 정말 기뻤어요. 제가 멈추기를 바라지 않는 누군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제야 고백하는 거지만, 제가 두 번째로 멈추었을 때는 사실 제가 죽은 척 해 본 거였어요. 미안해요. 누군가 저를 살려내는 것을 어떻게든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그랬어요. 그 뒤로도 제가 멈출 때마다, 기적은 계속 일어났어요. 죽어도 죽어도 계속 살아났어요.


제가 평범한 시계가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눈치챈 거죠. 이전에는, 나 같은 시계를 이렇게 소중히 다룰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나보다 좋은 시계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지 않고서야 큐빅도 듬성듬성 빠지고, 도색마저 벗겨져서 볼품없는 나를 번번이 살려낼 이유가 없었죠. 그래서 너덜거리던 끈이 마침내 떨어져 나갔을 때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게 저만의 착각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네요. 저를 처음 사러 매장에 들어왔던 당신들의 모습이 이제야 떠오르네요. 당신의 모습도 기억나요. 아내에게 이 순간을 기념하는 시계를 선물하고 싶다고 했죠. 내 기억이 맞다면, 그 날은 틀림없이 아내의 생일날이었을 거예요. 아무리 비싸도 가장 예쁜 시계를 사주겠다고 당신은 호언장담 했었죠. 하지만 당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당신의 아내는 구석에 처박혀 있는 저를 집어 들었죠. 그때, 제가 가격이 꽤 저렴했었거든요.


맞아요. 저는 하나의 시계이기 이전에, 기념이었어요. 아내의 생일 선물이었고, 당신의 마음이었던 거죠. 그래서 기를 쓰고, 저를 살려냈던 거였어요. 낡고, 볼품 없어진 저를 당신의 아내가 왜 애지중지했는지, 그 마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다음에는 저보다 더 멋진 시계를 아내에게 선물할 거라고 약속해 주세요. 큐빅도 없고, 도색도 벗겨지지 않는 그런 시계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당신의 마음처럼 오랫동안 써도 바래지 않는 시계를 선물해 주세요.”




다 사용하지 못한 화장품 하나를 아내가 들고 나온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손목시계도 하나 들고 나온다.

손바느질로 완성한 컵받침도 하나 들고 나온다.


이 세 가지를 집에서 떠나보낼 준비가 됐다고 내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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