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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um May 26. 2017

컵라면과 켄싱턴 마켓

토론토에서의 마지막 날 오후, 비아레일을 타기 전

“최소한 컵라면 정도는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침대에 누운 채로 아내가 속삭였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컵라면?” 

“열차에서 먹을 컵라면이 필요해!” 시큰둥한 내 반응이 못마땅했던 걸까? 또박또박 명확한 발음으로 그녀가 맞받아친다. 

“당장 어디서 컵라면을 구해?”  

“피곤하니까, 자고 일어나서 다시 얘기하자.” 

컵라면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그녀인데, 마무리도 자기 맘대로다. 억울하다. 이대로 잠들 수는 없다. 뭐라고 한마디 해야겠다. 잔뜩 벼르고 있는데,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녀의 숨소리가 달라졌다. 먼저 잠들어 버렸다. 


혼자서 곰곰이 따져 보니, 아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열차 안에서 식사는 어떻게 하지? 잠이 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녀가 옳았다. 혼자서 뒤늦은 끼니 걱정을 한다. 한두 끼도 아니고, 자그마치 3박 4일 동안 먹을 식사였다. 두 사람 양이니 대강 따져도 스무 끼다. 단식도 한 두 끼지,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었다. 


물론 비아레일 열차 안에는 식당칸이 마련되어 있었다. 꽤 훌륭한 식사를 제공한다는 평이 있었지만, 양식 일변이었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식당칸은 탑승객 누구나에게나 열려 있었다. 식사시간이 되면 누구든지 메뉴를 선택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합석은 필수였다. 생소한 요리를 먹는 것도 마뜩지 않았는데, 낯선 사람들과 마주한 채 밥까지 먹어야 했다. 대화는 필수였다. 밥이 목구멍으로 제대로 넘어갈 리가 없다. 이거 어쩌지?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내가 부산을 떨었다. 갈 데가 있다고 난리법석이다. 핀치역 인근에 있는 마트에 가야 한단다. 

“거기는 왜?” 

“컵라면 안 살 거야?” 

“거기에 컵라면이 있어?” 

“거기에 토론토에서 유명한 한인마트가 있대.” 


규모가 작다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었다. 정말 웬만한 식자재는 다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떡볶이와 김밥도 있었다. 떡볶이와 김밥의 등장에 흥분됐지만, 욕심을 부릴 수는 없었다. 떡볶이와 김밥을 쟁여들고 열차에 오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눈 앞에 보이는 수많은 한식 재료들도 다 그림의 떡이었다. 열차 안에서 한식대첩을 펼칠 수는 없었으니까. 신중하게 식재료를 고르고 말 것도 없었다. 결론은 벌써 정해져 있었다. 열차 안에서 먹을만한 건 컵라면뿐이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또 한 번, 그녀가 옳았다.


그 순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아내의 선견지명을. 한국을 떠날 때부터 악착같이 챙겨 온 누룽지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지. 

사실 난, 누룽지 한 톨 먹을 자격조차 없었다. 그녀에게 저질렀던 원죄 때문이다. 짐을 싸면서, 수화물 가방에 누룽지를 아득바득 챙겨 넣는 그녀를 애초부터 못마땅해했다. 기껏 내가 한 일이라곤, 짐만 된다고 그녀에게 한껏 핀잔을 준 것뿐이다. 누룽지에 따뜻한 물만 부으면, 얼마나 훌륭한 한 끼가 되는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녀는 처음부터 옳았다.



드디어, 토론토를 떠나는 날이다. 대도시를 여행하기에, 5일은 짧았다. 도심을 정신없이 누비고 다닌 기억밖에 없는데, 시간이 우리를 앞질러 도망간 기분이 들었다. 


숙소를 나서자마자,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석별의 눈이다. 기약 없이 떠나보낼 수는 없다는 듯이 작정하고 퍼붓는다. 눈앞의 눈이 눈을 가린다. 15분 정도 걸으면 핀치역에 도착하는데, 오늘은 방향조차 분간조차 되지 않는다. 


낭만이 깨지는 데는 몇 발자국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석별의 감정은 이미 눈 녹듯 사라졌다. 거침없이 쌓여만 가는 눈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조차 힘들었다. 짊어지고 끄는 짐이 천근만근이다. 쌓인 눈이 캐리어의 바퀴를 연신 붙잡는다. 바퀴는 순식간에 기능을 잃었다. 아예 구르지 않는다.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인 바퀴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바퀴가 구르지 않는 캐리어는 거대한 족쇄였다. 이대로라면 영원히 핀치역까지 도착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눈 속에 파묻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내의 캐리어를 빼앗듯이 낚아챘다. 가방 두 개를 양손으로 질질 끌면서, 묵묵히 걸었다. 앞장서서 눈밭에 길을 내기 시작했다. 캐리어를 끄는 게 아니라, 영락없이 눈을 치우고 있는 모양새였다. 


“동계올림픽에 캐리어 끌기 종목이라도 생기면 국가대표로 출전해도 될 것 같은데?” 

침묵으로 일관하던 아내가 입을 열었다. 없던 힘도 내라고, 격려를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힘이 불끈 난다. 없던 흥도 생겼다. 빨래하듯 힘을 짜내서 걷고, 또 걸었다. 하염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사방이 고요하다. 너무 조용해서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한번 돌아봤다. 


아내가 눈밭을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내가 힘겹게 낸 길을 사뿐사뿐 걸으면서, 셀카를 찍고 있었다. 마구 찍어도 겨울왕국이 된다고 신기해한다. 가만 내버려 두면, 조만간 엘사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겨울왕국 주제가라도 한바탕 불러재낄 태세였다. 내 마음은 눈처럼 하얗게 타들어가는 것도 모른 체, 인생 사진을 남기고 있었다. 그녀가 토론토에서의 마지막을 마음껏 음미할 수 있도록, 보고도 못 본 척했다. 기꺼이 눈 치우는 마당쇠가 된다.




하루에 평균 25만 명의 승객을 실어 나른다는 유니온역은 기차역이 아니라 박물관 같았다. 세련되고 현대적인 기차역을 상상했던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토론토의 대표 기차역은 멋있게 나이 든 중년 남자의 모습 같았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건, 가방을 잠시 맡길만한 곳이었다. 잠시라도 자유의 몸이 되고 싶었다. 토론토를 떠나기 전에 켄싱턴 마켓에 가보고 싶었다. 역 안을 뒤졌는데도, 짐을 맡길만한 곳이 없었다. 코인 로커는커녕 물품보관소와 비슷한 것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캐리어를 끌고서라도 켄싱턴 마켓을 보고 올까? 미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정말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을 즈음. 역을 분주하게 누비고 다니던 아내가 돌아왔다. 짐 맡길만한 곳을 찾았단다. 따라가 보니, 기차 화물 발송하는 곳이었다. 


“여기에 수화물 보관할 수 있나요?”

“비아레일 승객이신가요?” 

“네. 오늘 밤 기차 예약했어요.”

“기차표 보여 주시면, 가능합니다.” 시원시원한 직원의 대답에 속이 다 뻥 뚫렸다. 

“얼마인가요?” 

“12달러입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짐을 맡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됐다. 천천히 지갑을 꺼내면서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아깝다고 생각 말고, 12달러를 내고 당당히 자유를 얻자. 딱히 다른 방법도 없잖아? 그녀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딱히 마땅한 다른 대안도 없었다. 켄싱턴 마켓에 가는 걸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나중에서야 깨달았지만, 12달러나 주고 짐을 맡길 필요는 없었다. 짐을 보관하지 말고, 수화물 발송을 일찍 접수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곰곰이 따져보니, 직원에게 한 최초의 질문부터 잘못되었다. 애당초 짐을 잠시 보관할 수 있냐고 물을 게 아니었다. 지금 수화물을 접수할 수 있냐고 물었어야만 했다. 어떻게든 짐을 보관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서, 현명하게 처리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켄싱턴 마켓에 도착하니, 거짓말처럼 눈은 사그라들고 있었다. 세상을 다 삼켜버릴 것처럼 내리던 눈이, 착한 아이처럼 온순해졌다. 이제 마음 놓고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녹아내리기 시작한 눈이 거리를 온통 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질척거리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조금씩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마음을 고쳐 먹으니, 그나마 기분이 좀 나아진다. 그제야 켄싱턴 마켓을 둘러볼 여유가 슬금슬금 피어오른다.  



“알폰스 무하다.” 

걸음을 멈춰 세운 건, 붉은 벽돌 위에 그려진 거대한 벽화였다. 평소 알폰스 무하를 좋아했던 아내였다. 누가 그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알폰스 무하가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했다. 원작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오랫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의 마음과 정성이 아스라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또 한 번 걸음을 붙잡은 곳은 음악이 흘러나오는 술집 앞이었다. 벌건 대낮이었는데, 사람들이 이미 취해 있었다. 술에 취했는지, 음악에 취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요란한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모습을 창밖에서 넌지시 바라보던 아내가 슬슬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거리 한복판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분명 개구쟁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왜 그랬어?” 한참 뒤에,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취하고 싶었나 봐.” 쑥스러운 목소리로 그녀가 고백했다. 

“당신, 충분히 취해 보였어.”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곳은 작은 빵집 앞이었다. 오랫동안 장사해온 동네 빵집 같았다. 빵집 안에서 사람들이 무심히 빵을 고르고 있었다. 대부분 단골손님처럼 보였다. 마실 나온 듯 편한 옷차림, 별다른 고민 없이 빵을 고르는 손님, 늘 먹던 빵이 품절돼서 미안하다는 주인. 모두들 잘 발효된 빵처럼 작은 빵집과 잘 어울렸다. 빵집 안을 두리번거리면서 신기해하는 사람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채 숙성되지 않은 밀가루 반죽처럼 우리만 겉돌고 있었다.


빵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단골들도 사지 않는 빵만 남아 있었다. 하나같이 투박하고 볼품없었다. 덕분에 오랫동안 망설일 필요조차 없었다. 불량배처럼 보이는 빵을 나는 골랐고,  너무 순수해서 아무런 맛도 나지 않을 것 같은 빵 하나를 아내가 집어 들었다. 


“열차 안에서 내내 컵라면만 먹을 수는 없잖아.” 빵집을 나서면서, 아내가 말했다. 갑자기 뭉클해졌다. 서로 마음이 통했다. 


빵집을 나오자마자, 때 맞춰 멈췄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진창으로 가득했던 거리가 거짓말처럼 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모든 게 그냥 얼어붙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한 이 순간이 이대로 얼어붙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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