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겸재 정선의 그림이 있었다
박물관에 도착하니, 오후 4시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입장하기엔 늦은 시간이다. 하지만 우린 이 시간에 일부러 맞춰 갔다. 사전에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온타리오 박물관은 금요일 오후 10시까지 야간개장을 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요일에는 오후 5시 30분까지만 문을 연다.
야간개장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데, 할인 혜택까지 있었다. 1인당 $7 할인을 받아서, 입장권 두 장을 $20에 구입했다. 주어진 관람시간은 대략 5시간 정도.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자만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급해졌다. 여유를 부리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박물관 안에서 시간은 인정사정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숨 가쁘게 도망쳤다.
박물관 정보를 미리 파악하고 갔지만, 당일치기 시험 준비를 한 학생의 심정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럴 때는 일단 욕심부터 버려야 한다고 다짐해본다. '지금 다 못 봐도 상관없어, 볼 수 있는 데까지만 보자. 행여 오늘 다 못 보더라도 언젠가 다시 와서 보면 되지.'
그나마 위안이 됐던 한 가지는, 간밤에 본 박물관 웹사이트였다. 커다란 동선을 잡는 데 도움이 됐다.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은 4층 건물이었다. 1층에는 캐나다 갤러리, 북미 원주민 생활 모습의 전시관, 일본 갤러리, 중국 갤러리, 한국 갤러리가 있었다.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기에 힘들어 보였다.
2층은 공룡, 새, 동물, 보석, 돌이 전시된 자연 박물관이었고, 3층은 남아시아의 예술품, 이집트, 청동기 물품, 그리스, 유럽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었다. 이집트 전시관에는 실제 미라가 전시되어 있다고 해서 꼭 들를 예정이었다.
자연 박물관에도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3층이 더 끌렸다. 1층을 보고 난 뒤에 바로 3층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다음에 자연사 박물관을 둘러볼 계획이었다. 그러고도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3층의 남아시아 예술품과 1층 북미 원주민 생활 모습을 마지막으로 둘러볼 생각이었다.
계획은 나름 치밀했지만, 예상 못한 변수가 많았다. 이론과 실습은 달랐다. 관람을 시작하고 난 뒤에야, 계획이 순진무구했다는 걸 깨달았다.
일단, 박물관의 규모가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이렇게 넓은 공간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려면, 체력 안배가 필수였다. 체력만큼은 나름 자신 있다고 여겼는데, 박물관 안에서 의자를 찾느라 바빴다. 하루 종일 추위에 떨면서 토론토 시내를 활보하고 다닌 후유증이었다.
두 번째 변수는, 몰입이었다. 한 번 집중하기 시작하면 시간 개념이 희미해지는 우리의 관람 태도는, 다수의 유물 앞에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는데, 호기심만 가득한 초짜 관람객에게는 무리한 요구였다.
입장하자마자, 눈길을 사로잡은 건 공룡들이었다. 자연사 박물관다운 환영식이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재현된 공룡뼈였다. 살점 하나 없는 뼈 앞에 서니, 이상하게도 상상력이 꿈틀거린다. 그들만의 전성기가 떠 올랐다. 오래전 지구를 마음껏 거닐었던 위풍당당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연상되는 것이라고는, 영화 <쥐라기 공원>에서 부활한듯한 포악한 공룡 모습뿐이다. 영화가 지닌 힘 덕분에, 상상력은 내 맘대로 통제되지 않는다. 공룡 발톱에 찍히기 전에 황급히 자리를 피하기로 한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1층 구석에 숨어 있는 한국 갤러리였다. 한국 사람이라고 유난을 떤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캐나다 박물관에서 한국 갤러리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섣부른 감격도 잠시 뿐. 한국 갤러리에 앞에 서는 순간, 마음은 한없이 움츠러들고 초라해졌다. 규모가 기대했던 것보다 소박했다. 아담한 한국 갤러리에 비하면, 일본과 중국 갤러리는 잔칫집이었다. 한국 갤러리라는 안내판마저 없었다면, 일본이나 중국의 전시로 착각될 정도였다. 상대적 박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한국 사람들도 우리 같은 기분일까?”
“그런 마음이 안 든다면 애정이 없는 거겠지.”
섣부른 서로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몇 점 안 되는 작품을 조용히 둘러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그림 아래 익숙한 이름이 하나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겸재 정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의 대가의 이름이었다. 그의 그림이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있었다. 소소한 습작에 가까운 그림이긴 했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인왕제색도>나 <금강전도> 같은 그의 대표작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쩌다가 겸재의 작품이 머나먼 타국의 박물관까지 오게 된 걸까?
뜻밖의 곳에서 뜻밖의 그림을 만나서 반갑기는 했지만, 왜 정선의 작품을 여기서 소장하고 있는지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 상황을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슬퍼해야 하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림 구석에 찍혀있는 원백(元伯)이라는 낙관이 순간 혼백으로 보였다. (원백(元伯)은 겸재 정선의 자(字)로 쓰였다)
3층의 이집트 전시관은 아내 덕분에 흥미진진했다. 그녀는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보자마자 술술 읽기 시작했다.
“여왕과 왕이 함께 여행을 떠났어. 여행 중에 여왕이 피곤해서 하루 정도 푹 쉬고 싶었나 봐. 그런데 왕이 그 마음을 몰라주고, 이렇게 좋은 여행에서 쉬는 게 웬 말이요? 하루 정도 쉬는 것은 집에 돌아가서 하십시다 그러는 거야. 그 뒤에, 왕은 전보다 더 바쁘게 미친 듯이 여왕을 끌고 돌아다녔어. 결국 여왕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기 직전에 과로로 죽고 말았대. 그제야 왕은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깨달았대. 참 슬프다. 그렇지?”
상형문자의 내용과 그녀의 말이 일치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대신 그녀의 몸과 마음이 어떤지 이해할 수 있었다. 뜻밖의 소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