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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Jan 09. 2024

장래 희망 아빠

엄마이지만 아빠가 되고 싶다


 결혼 전에 나는 드라마 <인어아가씨>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디즈니 공주가 되고 싶어 하는 만큼이나 비현실적인 환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품은 소망을 사라지게 할 수가 없었다. 일도 잘하고 성적 매력도 넘치고 살림살이까지 잘하는 완벽한, 이름조차 비범한 아리영은 가족을 배신한 아버지가 새로 꾸린 행복한 가정을 박살 내고, 진실한 사랑을 쟁취하고, 마침내 그림 같은 가정을 꾸린다. 그뿐인가? 시어른들까지 사로잡아 집안의 모든 사람은 아리영의 통제와 보살핌 아래 행복하게 살아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도 잘 안다. 막장 드라마의 시초인 명작 <인어아가씨>가 희생을 강요당하는 아내(어머니)들의 환상을 채워주는 연속극일 뿐이라는 사실. 울며불며 매달리다 버림받고 백마 탄 왕자(본부장급 이상 임직원)에게 구제받는 캔디형 여주인공이 아직도 생산 중인 모양이지만,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는 여주인공이 더 사랑받고 오래 기억되는 법이다.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이라면 <인어아가씨> 이후 여자 주인공들이 자신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 한 노력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아내의 유혹>의 ‘민소희’를 기억한다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 시절 인어 아가씨

 나는 내가 더 강해지고 유능하기를 채근한다. 집안을 완벽하게 정돈하고 건강한 밥상을 차려 먹고 매일 운동하기를 바란다.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책을 읽고 피아노를 연습하기를 바란다. 그뿐인가? 돈도 벌어야 한다. 이만하면 되었는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농담으로라도 남편과 가족에 관한 뒷담화를 하지 않기를 바라고, 사소한 일에 상스러운 말을 내뱉지 않기를 바란다. 남편에게 든든한 아내가 되어 주고 싶고, 아이에게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어렵지만, 정말 어렵지만 모두 해 내려고 노력 중이다.


 이 모든 바람을 무시하지 않는, 가능한 선에서 남편과 내가 모두 만족하는 상황에는 경제적 능력이 필요하다. 무급인 가사노동과 양육 외에 통장에 입금으로 찍히는 금액이 100만 원은 되어야 내 노동이 '일' 같고 수입이 '돈' 같지 않을까? 100만 원을 벌며 가사와 육아를 지금처럼 하려면 9시부터 3시 사이에 주 5일 일을 하면 된다. 간단한 셈법이지만 간단하지 않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사교육 국어(독서나 사회 포함) 수업인데, 방과 후 사교육 시간에는 내 아이를 돌봐야 한다. 내 아이를 굳이 학원에 보내면서 내가 다른 수업에 열중하기는 싫다. 아이 스스로 다니고 싶다는 학원이 늘어난다면 그때는 재고할 문제이긴 하지만, 아직은 강경 놀이터파인 유치원생이니 두고 볼 일이다.

 단어의 중대한 힘을 알고 '경력 단절'이라는 말을 '경력 보유'로 바꾸어 준 사람들은 고맙다. 놀이터에 앉아 있는 대부분 엄마가 그러하듯 나는 경력 보유 여성이다. 아니, 아무리 적은 시간이라도 꾸준히 수업하고 있으니 나는 현직 강사이다. 그러나 내 일에 대해 말할 때 역시 취미를 말할 때처럼 변명이 구차해지는 기분이다. "이거라도 해야지!"라고 말할 때 과장되게 비장해진다. 부자연스러운 구차함과 비장함이 은근하게 깔린 일상을 탁자 아래 밀어 넣고 이런저런 취미 활동으로 알록달록한 식탁보를 드리운 내 모습은 보기에 썩 괜찮다.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많고, 나도 이런 나를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을 남편에게도 인정받고 싶다. '너의 인정 따위 상관없다! 바라지 않는다! 나는 혼자 잘한다'라고 외치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남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만큼 남편에게 인정받고 싶다.


 <결혼 이야기>에 나오는 니콜(스칼렛 조핸슨)도 남편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좋은 엄마, 훌륭한 배우이지만 남편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혼을 결심한다. 남편을 사랑하고 결혼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니콜이 끝내 견디지 못하는 것은 찰리(아담 드라이버)의 자기중심적인 결정들이다. "내가 하는 건 제안이고, 당신이 하는 건 약속이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여자 중 한 명인 스칼렛 조핸슨도 이기적인 남편으로 괴로워하니 나의 고뇌 정도는 당연한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글을 쓰고 있지.

변호사 노라와 주인공 니콜

 "아빠는 부족해도 그런가 보다 하죠. 솔직히 좋은 아빠라는 개념도 고작 30년 전에 나왔어요. 그전까지 아빠들은 말도 안 하고 자식한테 무심한 못 미덥고 이기적인 존재였죠. 아빠들이 변하길 바란다지만 기본적인 수준에서 그냥 받아들여요. 아빠는 실수투성이라 사랑하죠. 하지만 엄마가 그런다면 사람들 다 들고일어나요. 구조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받아들이지 않죠. 우리의 유대교와 기독교 뿌리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완벽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마리아는 동정녀로 아이를 잉태했고 꿋꿋하게 자식을 부양했으며 죽을 때는 시체도 끌어안고 있었죠. 근데 아빠는 없었어요. 심지어 섹스도 안 했죠. 하나님은 천국에 있고 하나님이 아버지고, 나타나지 않았죠. 그러니까 당신은 완벽해야 하고 찰리는 망치든 만든 상관없어요. 항상 당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훨씬 까다롭죠. 짜증 나지만 현실이 그래요."


 이 대사를 그대로 옮겨 쓰고 싶어서 영화 <결혼 이야기>를 다시 봤다. (정말 좋은 영화니까 넷플릭스 구독자라면 모두 보시길) 이혼 전문 변호사 노라의 말처럼 엄마에게는 한 톨의 잘못도 용서되지 않는다. 엄마가 저녁마다 와인을 마시면 알코올 중독자라 몰아가지만, 아빠의 사생활은 양육권을 다투는 협상테이블에 오르지도 않는다. 유능한 아빠는 바쁘고, 바쁘면 아이를 돌보는 것이 일 순위일 수가 없다. 아이는 부부가 함께 키우는 것이 지극히 옳지만, 아무튼 엄마에게는 무조건 아이가 일 순위여야 한다. 엄마에게 아이가 일 순위라면 아내에게는 남편이 일 순위이기를 바라는 법. 그렇게 엄마와 아내는 커다랗게, 여자 사람 자체는 자그마하게 만들어 간다. 쇼핑이나 힐링 나부랭이 단어들로 받는 위안에 기대어 그럭저럭 살아가길 바라면서.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고, 가급적 극적이지 않은 편이 이롭지만 어쩌겠는가. <사랑과 전쟁>이 실제 상황의 순한 맛인 것처럼 현실은 드라마보다 각박하고, 이제는 그리되고 싶지도 않지만 나는 아리영이 될 수도 없는걸. 완전히 불가능한 꿈이라는 점에서 별 다를 바 없는 내 바람은 아빠가 되는 것이다. 돈 버느라 늘 피곤하니까 집에서는 항상 널브러져 있어도 안타깝고, 안쓰러우니까 다 차려주는 밥상을 맛있게만 먹어도 고맙고, 어쩌다 한번 가족 나들이라도 가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아빠. 아내가 밥하고 설거지하고 집안 정리하고 밤을 준비하는 동안 그림책 2권 읽어주며 아이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빠. 마음 쓸 줄 몰라도 남자는 원래 무디다며 인정받는 아빠, 제 기분 좋을 때 한 번씩 아이를 꼭 껴안아 주며 기분 내는 아빠. 나는 아빠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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