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넘도록 살던 동네에는 정체가 애매한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가 있었다. 춘향이, 향단이, 야생마... 간판이 이랬다. 간단하게 '술집'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보통 술집과는 달랐다. 그런 술집에는 여자들이 손님으로 가지 않았고, 여러 여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어두운 시트지나 인테리어 판자(?)로 가려진 문과 창 때문에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해가 지고 거리가 완전히 어두워져야 가게의 문이 열렸다.
그 가게들을 볼 때마다 드라마 '덕이'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예쁘고 똑똑하던 여자아이가 술집 여자가 되어버렸다. '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짙은 화장을 하고 야한 옷을 입은 강성연 배우가 너무 아름다워서 놀랐다. 강성연 배우는 옛날 미스코리아들처럼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파란색과 보라색의 아이섀도를 발랐다. 남자들 사이에 앉아 짙은 붉은색 립스틱을 바른 입술로 크게 웃으며 술잔을 받았다. 아하하하하, 고개를 젖히며 웃는 여자의 가슴께에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지폐를 찔러 넣었다. 나는 크게 놀랐다. '드라마에 저런 장면이 나올 수도 있나!'
내용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덕이"에서 강성연이 술집 여자로 사는 시기는 일시적인 추락의 시기였지 싶다. 덕이 외에도 술집 여자가 나오는 드라마는 널리고 널렸었다. 뭐, 지금도 툭하면 나오는 조폭 영화에 역시 툭하면 나오는 술집 마담 이야기가 차고 넘치지만 말이다. 나는 "똑똑한 여대생이 이런 식으로 신세를 망칠 수도 있다."라는 메시지에 놀란 것이다. 보통 드라마에 나오는 술집 여자들은 어쩐지 맹하고 단순한 옛날 여자들이었으니까.
그때쯤이었다. 늘 무심히 지나치던 어쩐지 수상한 술집들이 눈에 들어온 것도. 버스를 타고 지나던 길에도 벽이 까맣고 형광 분홍색 간판을 단 "춘향이" 종류의 가게가 많았는데, 어느 따뜻한 저녁 나는 그 가게 앞에서 한참 신호 대기 중인 버스에 앉아 있었다. 여자들이 여럿 나와 있었다. 머리는 길고 화장은 짙고 옷은 지나치게 얇은 여자들이 가게 벽에 기대서, 혹은 의자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또래나 언니뻘 되는 여자 사람들.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역 앞에 있는 붉은 조명 가게들만 피할 곳이 아닌가 보다. 이런 술집이 여기에도 있었네, 우리 동네에도 있잖아, 학교 후문에도 있었어, 정말 많잖아?
드라마가 아니야. "덕이"에 나오는 슬픈 강성연은 어디에나 있는 걸까? 저기서 일하게 되면 그대로 낭떠러지 같은 건가? 저기 붙어 있는 '숙식 제공 일자리'에 취직한다면.
드라마에는 룸살롱에 간 남편이 아내에게 등짝을 후드려 맞거나, 노래방 도우미로 동네 주민을 만난다든지 하는 식의 이야기도 흔히 나왔다. 그게 소리 한 번 빽 지르고, 대충 사과하면 넘어갈 수 있는 에피소드인 양 나왔다. 정말,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조폭 영화를 본다고 깡패가 되지는 않겠지만 장난으로 깡패나 양아치 흉내를 내면서 모두들 즐거워했다. 하지만 술집 여자가 우스갯거리가 될 수 있을까? 진짜 조폭들은 아주 가끔 갈빗집 앞에서나 봤는데 술집 여자는 매일 마주치는구나. 조폭들이 모여있는 사무실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술집은 흔하디 흔했다.
그리고 텔레비전만 틀면 나오는 룸살롱의 여자들, 한 동네에 버젓이 사는 여자들. 여자들에게는 그런 삶이 하나의 옵션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도 그리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진지하게 궁금했다. 온 동네에 가는 곳마다 저런 여자들이 산다면, 그 삶은 보통 여자아이들 누구나가 살 수도 있는 삶이 아닌가? 그런 술집이 골목마다 있다면 거기서 일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되지 않는가? 상상력이 과하다고? 과한 걸까? 그럼 별 수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