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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May 17. 2023

어리숙하고 똑똑했던 나에게

그때는 좀 지저분하게 다니고 그랬지 뭐


태어날 때부터 작은 아이였던 나는 중학생이 되도록 길을 묻는 어른들에게 '꼬마야' 소리를 들을 정도로 키가 작았다. 내가 살던 산골에는 ‘가(假)입학’이라고 해서 유치원에 가는 대신 미취학 아동을 분교에서 1, 2학년과 함께 돌봐주는 제도가 있었다. 빠른 연생이라 7살에 입학 예정이던 나는 6살 때 언니 오빠들과 학교에 다녔었다. 그때부터 ‘똑똑하다’라는 칭찬을 듣기 시작해서 어린 마음에 자신감이 가득해졌다. 분교의 동급생이 나까지 3명이었던 점, 전교생이 겨우 12명이었던 사실에 주목할 만큼 똘똘하지는 않았지만.


 산골에서 대가족으로 살던 나는 3학년 때부터 할머니와 둘이 대구로 유학을 나왔다. 셋방을 얻는다고 집에 키우던 암소를 팔았다. (나는 83년생, 산골의 시간은 더 느리게 흘러 도시에서는 동년배들이 이런 이야기에 놀란다) 전학하며 엄마, 아빠와 떨어져서 사는 것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설레고 즐거웠다. '선생님이 대구 전학을 권할 정도로 똑똑한 아이'라는 어른들의 말대로 자부심과 자신감에 꽉 차서, '나는 똘똘하고 귀여운 어린이'라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었다.


  3천 명이 넘는 커다란 학교에 다니는 생활이 재미있었다. 학업 성적이 좋았고, 일기장 검사나 동시 쓰기 같은 걸로 상을 받아 자랑스러웠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여자 부반장(반장 하나에 남녀 부반장을 하나씩 뽑았었다)이 될 수 있었고, 방학에는 시골에서 지내며 실컷 놀 수 있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선생님이 학부모의 직업을 조사할 때 제일 먼저 호명하는 "농업"에서 혼자 손을 번쩍 드는 아이가 나라는 것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학교 친구들에게는 재미있게 각색한 산골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산골 친구들에게는 허풍이 가득한 도시 학교 이야기를 하면서 으쓱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좀, 아니 아주 꾀죄죄했다. 시골 아이치고도 까만 피부에 머리숱이 많은 편이었는데, 문제는 그 빽빽한 머리카락 사이에 머릿니가 있다는 점이었다. 산골에 살 때는 오히려 깔끔한 편이었는데, 대구에 살면서 머릿니가 생겼다. 하지만 매사 당당한 어린이였던 나는 머릿니가 있다는 사실도 부끄럽지 않았다. 돌이켜 떠올리면 저세상 위생 관념을 가진 아이였던 10살의 나는 양치질을 잘 하지 않았다. 아침에 거울을 보며 이ㅡ하고는 ‘고춧가루가 없으니 괜찮군!’ 하고 등교하기 일쑤였고, 목욕은 당연히 자주 안 했고, 머리도 잘 감지 않았다. 감더라도 젖은 머리카락을 말릴 생각을 못 했다. 머리 감는 법 자체를 잘 몰랐다. 어느 여름날 저녁, 집에 혼자 있던 나는 머리에 물을 잔뜩 끼얹었다. 수도에 쭈그리고 앉아 머리 구석구석 물을 바르고 수건으로 닦으니 개운한 기분이어서, 집에 돌아온 할머니에게 혼자 청소해놓은 아이가 뿌듯해하듯이 "할매! 나 물로 머리 감았다!" 하며 자랑까지 했다. 할머니에게는 아주 혼이 났다. 그러면 머리에 서캐가 더 생긴다고, 더 더러워진다고 했다. 방바닥에 커다란 달력을 뜯어서 깔고 머리에 에프킬라를 뿌려 참빗으로 두피가 아프도록 싹싹 빗어 내렸다. 이와 서캐가 후드득 떨어지면 손톱으로 야무지게 탁탁…. (쓰면서도 비위가 상해 읽는 분들께 죄송한 마음마저 든다)


 할머니의 결단으로 머리를 댕강 잘랐다. 미용실에서 성의 없이 잘라준 내 머리는 드래곤볼의 손오공처럼 뻗쳐있어서 다음날 학교에서 바로 놀림을 당했다. 다시 할머니의 손을 잡고 미용실에 가서 잠깐의 언쟁 끝에(할머니는 커트비를 두 번 낼 수 없다고 했다) 내 머리는 단정한 쇼트커트가 되었다. 파마해서 정성스레 디스코 머리로 쫑쫑 땋아주던 딸의 머리가 그 꼴이 되었을 때의 속상함을 엄마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머리를 자르고 이가 없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는 있다가 없다가를 반복했겠지. 그 후에 한 번 5살 많은 멋쟁이 사촌 언니가 ‘머리는 일주일에 두세 번 반드시 감아야 한다.’라고 다정하게 알려주었던 것과, 4학년 담임 선생님이 방과 후에 나를 불러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부반장이 깔끔하면 더 좋지 않겠니.’ 했던 기억이 생생한 걸 보면 여전히 꾀죄죄한 아이였던 모양이다. 친척 집에서 얻어 몸에 잘 맞지 않는 낡은 옷을, 그마저도 깨끗하지 않게 입고 다니는 몸도 마음도 어리기만 한 아이.

내용 관계 없이 요즘 예쁜 때죽나무

 내가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친구 엄마는 보통 나를 마뜩잖은 시선으로 훑어보곤 했다. 어른들의 그런 눈빛은 아이들이 놓칠 수 없는 법이다. 엄마의 기분을 바로 알아채는 나보다 깔끔하고 똑똑한 내 친구들은 들뜬 목소리로 급하게 나를 변호하곤 했다.

“엄마, 얘가 우리 반 부반장이야.”, “엄마, 얘가 이번에 3등을 했어.”, “엄마,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은 친구야.”라고 하면 엄마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가느다랗게 뜨며 나를 뜯어봤다. 잠시 따가운 눈빛을 견디면 할머니가 주지 않는 간식을 먹으며 친구와 같이 숙제를 할 수 있었다. 시장 근처에 살 때 자주 놀러 가던 윤이네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어른처럼 음악 감상을 해보았다. “도대체 노래는 언제 나오는 거야?” 하며 듣던 전주가 긴 노래가 공일오비의 ‘신인류의 사랑’이었던 게 기억난다. 화재 예방 포스터를 그릴 때 교과서에 나오는 전형적인 스타일(성냥개비와 시뻘건 불길)을 그리는 내 옆에서 윤이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발휘했다. 불타고 있는 주택 앞에 오렌지색 옷을 입은 여자 아나운서가 울면서 마이크를 든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인물이 울고 있는 이유는 ‘화재 현장 취재를 나온 곳이 하필 본인의 집이어서’라고 했다. 학교 숙제로 내기에는 복잡한 이야기였고, 어른들이 보기에는 화재 예방 포스터가 아니었다. 윤이가 다시 그리라는 엄마의 조언을 듣지 않자, 내가 겁을 먹을 만큼 화를 내던 윤이 엄마의 말투가 기억난다. “너도 얘처럼 똑바로 그려!”


 윤이에게서 빌린 동화책을 내 책이라 우기는 바람에 윤이와 사이가 틀어졌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야 그 책이 내 책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원래부터 윤이는 우리집에 놀러 오지 않았고 내가 찾아가야 만날 수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밖에서 아무리 불러도 윤이 방의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포스터와 책 사건만이 전부는 아니었겠지. 내가 깔끔한 어린이였다면 친구와 친구 엄마들이 나를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 윤이 엄마의 행동과 말투에서 ‘할머니와 사는 추레한 이 아이보다 네가 공부를 못하고 그림도 못 그린다는 게 말이 되니?’를 느꼈다면 그건 어린 나의 신경과민이었을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땟국이 흐르는 듯한 아이로 지냈다. 초등학교 시절의 사진을 보면 공주 스타일의 2학년 이후, 졸업식 사진까지 모든 사진에서 일관적으로 추레한 모습이다.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 나의 새까만 머리카락은 살짝 떡져있고, 눈이 부신 건지 표정이 떨떠름하다. 작아진 빨간 티셔츠와 너무 큰 멜빵 바지가 안타까울 만큼 촌스럽다. 세수는 했을 텐데 얼굴은 또 왜 얼룩덜룩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명한 기억으로 남은 장면은 그 빨간 티셔츠를 입고 거울 앞에서 머리핀을 꽂았다 뺐다 하며 긴 시간 예뻐 보이려고 애쓰던 내 표정.


아이가 찍은 작고 예쁜 꽃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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