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괴롭힌 나쁜 할머니는 아직도 엄마를 괴롭힌다. 엄마가 시집살이를 당한 세월만큼 긴 세월이 할머니의 죽음 이후에 펼쳐졌어도, 딸이 듣기 싫다고 역정을 내도 꿋꿋하게 할머니를 험담한다. 할머니가 엄마를 괴롭힌 일화들을 들으면 기가 막히는데, 최근에 새롭게 듣게 된 이야기는 이렇다.
갓 시집온 며느리가 지천으로 널린 이름 모를 나물들 한 광주리를 뜯어 다듬어서 삶았다. 물기를 짜서 무치려는데, 아까부터 마루에 앉아 그 모습을 쭉 지켜본 시어머니가 그제야 못 먹는 잡초를 뜯어왔다고 타박하며 나물을 다 쏟아버렸단다. 사과밭에 지천으로 꽃을 피워 솜털 같은 씨를 날리는 개쑥갓을 보고 옛 기억이 떠오른 엄마가 분통을 터뜨리며 한 가지를 더 말했다. “내가 이 고추밭에서 일하면 저 비탈길 위에서 할마시가 와서 지켜보고 서 있었다. 내가 일을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 보려고. 그렇게 일이 많은데 밭일을 돕지도 않고 집에서 밥을 하지도 않고 한참이나 내 일하는 걸 지켜보고 섰다가 갔다.”
이전까지 들은 악독한 일화들에 비하면 귀여운 사건이지만 참 어지간히도 고약한 인간이었다 싶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이 얼마나 기구했는지를 이야기할 때는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는 엄마가 아직 할머니를 용서하지 못한 것처럼, 엄마의 마음에 오래 동화된 나는 할머니를 원망하고 미워했다. 앞으로도 한참 더(어쩌면 평생) 할머니를 욕할 엄마를 보며 복잡한 마음을 느낀다.
누워 있던 할머니, 가끔 정신이 돌아오던 할머니, 모든 걸 잃은 노인이 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우울하다. 아빠는 늘 그렇듯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고 엄마는 삼 남매를 돌보며 동네에 있는 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면서 시어머니의 병시중을 들어야 했다. 엄마는 단 한 번도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을 한 적 없는 할머니를 전문 간병인보다 더 정성껏 돌보았다. 정성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병구완은 도리였고 대안이 없는 선택지였으니까.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혼자 외출했을 때 해가 지도록 골목길을 헤매었기 때문에, 우리가 집을 비운 동안은 나무로 된 현관문을 밖에서 잠그게 되었다. 할머니가 거실 바닥에 대변을 보거나 김치통에 복숭아 껍질을 잔뜩 넣었던 게 기억난다. 깡마른 할머니가 쭈그려 앉은 모습, 그런 모습이 내 머릿속 할머니의 전부인가.
내가 할머니의 방에 들어가지 않던 그 시기는 가족의 암흑기였다. 엄마와 아빠가 싸웠고, 고모들끼리 싸웠고, 고모들과 엄마가 싸웠고, 나는 고모들과 싸웠다. 우리는 모두 지치고 화가 나 있었다. 어느 날 방에 누운 할머니가 자식과 며느리와 손주들을 향해 제발 좀 그만하라고 소리를 쳤지만, 그만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남동생 대신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주러 억지로 그 방에 들어갔던 날이었다. 어쩌다가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니는 윗는 기 이쁘다." 떨리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웃는'을 '윗는'이라고 말하는 쭈그러진 얼굴도 조금 웃고 있었다. 나는 '뭐라 하노' 피식 웃고 방에서 나왔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 순간의 할머니는 내가 아는 할매였다. 자식들에게 짐짝이 되어버린 치매 노인이 아니라 나의 할매였다. 고약하고 별스럽지만 솔직하고 개성 넘치는, 나와 닮은 우리 할매. 크레파스로 꿩을 잘 그리던 우리 할매, 어린 손녀가 하는 온갖 이야기를 다 들어주던 나의 할매가 거기 누워 있었다.
할머니의 말을 들었을 때는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할머니를 향한 다정한 마음은 엄마에 대한 배신이었다. 고모들이 우리를 괴롭혔고, 할머니가 그 이유였으니까. 할머니를 미워하는 일은 쉬웠다. 내 감정에는 융통성이 없어서 엄마와 할머니를 동시에 사랑할 수 없었다.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우리를 괴롭히는 친척들도, 아픈 할머니도 죽어서 사라지는 것만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정말 할머니의 죽음으로 무언가 해결되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힘겨운 시집살이가 끝났고, 남동생은 방을 되찾았고, 우리 가족은 좀 편해졌으니까.
어쨌든 할머니는 죽었다. 나와 13년 동안 한방에서 자고 10년 동안 멀어지다가 완전히 내 곁을 떠난 할머니. 그날 할머니 곁에서 울어버리고 어린 시절 기억 속의 할머니를 불러냈더라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의 마지막 날들에 내가 얼굴을 비추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할매와 나의 시절로 가는 길을 가로막은 더러운 먼지와 매캐한 연기를 걷어내며 드디어 할매를 추억해 본다.
벼가 밝은 연둣빛으로 쑥쑥 솟는 초여름, 가느다란 빗줄기에 어울리지 않는 세찬 바람이 불던 아침에 분교에 나를 데려다주던 할매. 함께 쓴 허접한 우산이 뒤집히려 해서 나는 할매에게 달라붙어서 넘어질까, 비를 맞을까 겁을 냈다. 우산은 뒤집혀서 논바닥으로 날아갔고 나는 교실에 들어갔다. 할매는 우산을 주워서 집에 갔을까?
몸이 약해 툭하면 코피를 흘리는 나에게 할매가 지어다 준 한약(엄마는 한약 한 재 지어준 걸로 십 년도 넘게 뻐긴다고 비웃었다)이 떠오른다. 쓴 약을 먹기 싫다고 목이 쉬도록 소리 높여 울면, 할매는 나를 달래다가 화를 내다가 한숨을 쉬고 욕을 하다가도 기어코 박하사탕을 들이밀어서 약을 먹게 했다.
반찬 투정을 하면 콩가루를 묻혀서 한 알씩 입에 넣어주던 밥 경단, 숟가락으로 속을 파서 먹여주던 사과, 시험을 잘 본 날 시장에서 배가 부르도록 먹은 염통 꼬치, 할매가 사준 철쭉 색에 하얀 물방울무늬가 있는 티셔츠, 배탈이 나면 내 배에 올려주던 쑥뜸, 늦은 밤 꼭 끌어안고 같이 보던 드라마 ‘걸어서 하늘까지’, 같이 부르던 주현미의 노래, 보들보들하게 축 처진 할매의 피부를 만지면서 ‘귀엽다’라고 말하면 콧방귀를 뀌던 목소리. 할매는 조각보 같은 이미지로 남았다. 할매의 생일은 무더운 여름이지만 나는 날짜를 모른다. 할매가 죽은 날은 날도 너무 따뜻하던 봄날로 기억할 뿐, 날짜는 모른다. 엄마는 할매의 제사가 되면 생전 좋아하던 명태전을 부치고 참외를 사지만, 나는 제사를 지내러 가지 않는다. 그래도 '윗는 기 이쁘다'라던 할매의 말은 오래오래 기억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