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예쁜 아이’였다. 10대 시절 명절이면 오랜만에 만나도 반갑지 않은 친척들이 “어릴 때 진짜 예뻤는데….”하는 그런 아이 말이다. 두꺼운 앨범에는 색이 날아간 듯 누런빛의 사진이 많다. 친척들과 함께 달성공원에 놀러 간 어린 나. 턱이 합죽하고 피부가 새카만 작은 아이가 아프로스타일처럼 빠글빠글한 파마머리를 한 채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다. 늘 나에게 ‘예쁘다’라는 칭찬을 퍼붓던 엄마가 해준 이야기이다.
“이제 겨우 말귀 알아먹고 뛰어다닐 나이였나? 아무튼 네가 진짜 어릴 때였다. 장날 미장원에 데려가서 예쁘게 해 준다고 했더니, 파마하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더라. 어린애가 어찌 그리 잘 앉아 있냐고 미장원 아줌마랑 손님들도 다 놀랐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파마머리는 아주 관대하게 표현해도 ‘귀여운’ 정도로 솔직히 말하면 웃긴 머리 모양이었다. 미용실에서 깜박 잠든 시트콤의 주인공이 깨어났을 때 거울을 보고 비명을 지를 만큼 곱슬곱슬한 머리 모양이었지만, 아무튼 그 시절 나는 자타공인 ‘예쁜 아이’였다.
젊은 아빠와 어린 나
전교생이 12명인 분교에 늘 같이 다니는 내 친구(지금도 예쁘다)도 나보다 예뻤고, 옆 동네에는 ‘미녀’라고 할 만한 동생(나와 연락은 안 하지만, 엄마 말로는 눈에 띄는 미녀라고 한다)도 있었다. 지금은 객관적이다 못해 냉철한 자아 평가를 하는 나이지만, 그때의 나는 내가 귀엽고 예쁜 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엄마가 습관처럼 하는 예쁘다는 칭찬에 세뇌가 되었달까? 아무튼 분교 시절의 나는 자신감이 넘치는 어린이였다. ‘나는 귀엽고 예쁘고 똘똘하다’라는 믿음은 나를 당당한 아이로 만들어 주었다.
시골 분교에서 지낸 2년 동안, 나는 사랑받는 아이였다. 엄마는 나의 긴 머리를 정성스럽게 땋아주었고 입학식이나 소풍날에는 새로 산 원피스를 입혀주었다. 내가 입은 분홍색 레이스 원피스는 나보다 예쁜 내 친구의 질투를 불러일으켜, 순둥이 친구가 등굣길에 마을 한가운데에서 오열한 일도 있었다. 나는 동급생 3명 중 가장 공부를 잘했고, 12명의 전교생 가운데 돋보이는 우등생이었다. 2학년 담임 선생님이 "수진이는 큰 학교로 전학을 보내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아빠는 기대에 부풀어 나를 대구로 유학 보낼 결정을 했다. 그렇게 세상모르는 꿈에 빠져 대구로 전학하며 단칸방을 얻어 할머니와 단둘이 살게 된 거였다.
전학 후에 나는 세상을 배우게 되었다. 먼저 내가 그리 잘나지 않았다는 평범한 진실을 깨우쳤고, 그러자마자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못한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내가 그리 예쁜 아이는 아니지.’라고 느끼는 순간이 점점 자주 찾아왔다. 대구에 사는 아이들이라고 해서 모두 도회지의 세련미를 갖춘 건 아니었지만, 교실을 쓱 훑어보면 눈에 띄는 여자아이들이 많았다. 뽀얀 얼굴에 주근깨가 귀여운 단발머리 아이, 나이아가라 파마(이게 뭔지 아는 사람은 나와 동년배일 것이다)한 머리를 늘어뜨리고 앞머리를 단정하게 핀으로 꽂은 아이, 차분한 생머리를 흐트러짐 없이 올려 묶고 깃이 하얀 셔츠를 입은 아이…. 할머니 손에 이끌려 미적 감각은 포기하고 머릿니 박멸에 중점을 두느라 멋없는 짧은 머리를 한 내 눈에는 예쁜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아역배우처럼 이목구비가 선명하다기보다는 산뜻한 샴푸 냄새와 존슨즈베이비 로션 향기를 은은하게 풍기는 여자아이들이었다.
4학년 때 친구의 친구로 잠시 친하게 지내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해사하게 맑은 얼굴에는 분홍빛 뺨이 빛났다. 날 때부터 그런 색이었다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만화 영화에 나오는 공주님처럼 길게 구불거렸고, 줄무늬 티셔츠의 흰색 부분에는 얼룩이 하나도 없었다. 어느 날 그 아이네 집에 놀러 갔는데, 방에 들어가자마자 살짝 낡은 바지와 셔츠로 옷을 갈아입는 게 아닌가? “또 나갈 건데 왜 벌써 옷을 갈아입어?”라는 내 질문이 바보스러운지 친구들이 웃었다. 그 아이는 학교에 갈 때는 깨끗한 옷을 입고 골목에서 뛰어놀 때는 낡은 옷을 입는 거라고, 너희 집에서는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 않는지 물었다. “나는 그냥 이대로 놀다가 밤에 내복 입고 자는데?” 치토스 봉지에서 운 좋게 ‘한 봉지 더’ 쿠폰을 발견하고 셋이 손가락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까지 쪽쪽 빨아먹으면서 놀던 그날, 입술 옆에 있는 작은 점도 사랑스러운 그 아이는 계속 나에게 다정했던 것 같다. 그 아이도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 내가 할머니와 단칸방에 산다고 하니 좀 놀랐던 것도 같다. 긴 곱슬머리를 반묶음으로 올려 묶고 가끔 음악 시간에 오르간을 치기도 했던 그 아이가 교회에서 피아노를 배웠다고 해서, 교회에 따라가고 싶었던 그날.
어린 시절 나에게 ‘예쁜 아이’는 엄마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은 티가 나는 아이였다. 집을 나서기 전에 눈꼬리가 바짝 당겨 올라갈 정도로 빗어 묶은 머리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옷에는 얼룩이 없는지, 이는 제대로 닦았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엄마가 마지막으로 가방끈에 끼인 원피스의 둥근 장식 카라를 싹 빼서 탁탁 펼쳐준 후에, 새하얀 레이스가 달린 양말을 무릎 바로 아래까지 끌어올려 준 듯한 모습을 한 아이 말이다.
친구네 집에 가면 엄마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거나, 나만 용돈이 없어서 놀이터 옆 문방구에서 간식을 사지 못하는 일이 자꾸 생겼다. 내가 같이 놀고 싶은 아이들은 나에게 흥미를 보이다가 금세 떠나갔고, 하릴없이 방과 후에 동네를 돌고 있으면 학교에서 자주 혼나 기죽은 표정의 아이가 우리 집과 비슷한 자기 집에 초대하곤 했다. ‘어쩌면 나는 예쁜 아이가 아닐지도 몰라.’라는 자기 의심은 점점 자기 확신으로 변해갔다. 부반장으로 뽑히거나 시험을 잘 치면 잠깐씩 자신감이 차오르기는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초등 고학년 시절에 찍은 사진 속의 나는 꾀죄죄하고 주눅 든 얼굴을 하고 있다.
예쁜 아이가 되고 싶은 헛된 바람과 집착은 세월이 조금씩 덜어주었지만, 예쁜 아이를 만날 때마다 느끼는 ‘덜 예쁜 나’의 박탈감은 마흔이 가깝도록 털어내지 못하는 슬픔이었다. 행동거지에서 귀한 아이로 자라온 티가 나는, 그야말로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친구의 구김살 없는 모습을 보면 뒤돌아서서 구겨질 대로 구겨진 내 모습을 찾아내 자신을 괴롭혔다. 나는 낡은 옷을 얻어 입은 지저분하고 추레한 아이, 옷 가게 점원의 말을 거절하지 못해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사서 나오는 아이,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가 남자 선배에게 놀림을 받는 아이, 어울리는 옷이 없어서 대학 졸업 사진도 찍지 않은 아이였다. ‘예쁘지 않은 나’는 ‘사랑받지 못한 나’라는 거친 공식을 만들어 내 상처를 뭉뚱그리며, ‘예쁠 수 있었던 나’를 제대로 돌봐주지 않은 어른들에 대한 원망을 오래도록 깊게 품고 있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예쁨’이 ‘애정 어린 보살핌’이라는 뜻이었음을 깨닫고, 넘치도록 바라던 ‘애정과 관리’를 스스로 챙기는 법을배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야 내 안에서 ‘예쁨’의 의미는 책상에 꽂아두는 작은 꽃다발이나 보기 좋게 깔끔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제는 줄어든 단어의 힘이라고 쓰지만, 아침마다 여름이의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귀여운 핀과 원피스와 양말의 색까지 맞추고 있는 나를 보면 예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일은 불가능한 과업이지 싶다. 그래도 놀이터에서 뛰어놀아 땟국물이 흐르는 여름이가 빛나는 건 심혈을 기울인 나의 코디 덕분이 아니라 활짝 웃는 얼굴 덕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아침에 묶어준 선녀 머리가 석고대죄하는 봉두난발이 되어도, 새 옷에 먼지와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들러붙어도 반짝반짝 빛난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면, 예쁜아이를 만드는 것은 해맑은 웃음이다. 그러니까 내가 내 딸에게 바라는 예쁨은 ‘구김살이 없는 모습’에 가장 가깝다. 타고난 해맑음을 잊어가는 길고 긴 소녀 시절에 구겨지지 않는 삶은 없지만, ‘내가 참 귀염 받고 자랐지.’라는 믿음이 바닥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못난 나에게 나눠주는 타인의 작은 호의를 허겁지겁 받아먹고 배고파하지 않도록, 밖에서 예쁨도 귀여움도 받지 않는 때가 되었을 때 예쁘지 않음에 슬퍼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도 딸에게 "뭐야! 엄마가 예쁘다고 해서 내가 진짜 예쁜 줄 알았는데 아니었잖아!"라는 원망을 듣고 싶지는 않으니 예쁘다는 말도 귀엽다는 말도 적당히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