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동산에서(18)
(사진출처-픽사 베이)
그제가 정월대보름이었다. 난 농촌이나 시골 출신은 아니지만 정월대보름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있다. 정월 대보름날 우리 집 아침은 으레 오곡밥에다 나물반찬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날이면 또 우리(나와 누나)를 일찍 깨우셨다. 그리고는 "오늘은 찬물 세잔 마시고, 밥 세 그릇 먹고, 지게 석짐 하는 날이다"라고 말하시며 우리가 찬물에 세수하고 오기를 재촉하셨다. 안 그래도 해도 안 뜬 어둑한 새벽에 찬물로 세수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거기다 잠 덜 깬 얼굴로 밥상 앞에 앉으니 혀가 까끌까끌한 오곡밥에 이런저런 나물반찬이라니...
정월 대보름날 아침은 이렇게 항상 불평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부지런하셨던 아버지는 우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신발을 꿰신고 출근하러 나가셨다. 그날 아침은 한 해의 시작이니 부지런히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셨던 것 같다. 나이가 들고 이런저런 정월대보름의 풍속을 알게 되었지만 그날 아침에 아버지께서 하셨던 그 말씀이 나에겐 정월대보름의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그리고 저녁에 퇴근하시면서 '낙화생'이라며 땅콩을 사들고 오실 때가 많았는데 아침에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고소한 땅콩을 입에 넣으면서 눈 녹듯 사라지곤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것과 나물반찬을 안주삼아 함께 사 온 막걸리를 들이키시곤 했다. 그리고 지나가던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불러 같이 드시곤 했는데 그때는 아파트도 거의 없었고 우리 집은 1층 가정집에다 앞은 제법 큰 골목길이라 동네 사람들 지나가는 것이 다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분들도 스스럼없이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와 마루에 앉아 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막걸리를 마시거나 밥을 얻어먹고 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동네 사람들 모두가 서로 잘 알고 있었으며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는 몰라도 그 집 아저씨가 무슨 일을 하고, 아이들은 몇 살이고 그 집 아줌마는 무슨 화장품을 쓰는지까지는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다, 응팔에서 본 덕선이네 골목에서처럼 말이다.-
그때는 요즘처럼 바닷가에서 달집을 태우거나 하는 거창한 행사는 하지 않았지만 이웃들끼리 반찬을 나눠먹고 아이들은 설날 때 받은 세뱃돈으로 문방구나 점방(가게의 옛 이름)에서 화약을 사서 화약놀이를 하곤 했다. 폭음탄이나 콩알탄이 터지는 소리와 냄새는 아이들의 놀이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대보름날 하는 화약놀이는 뭔가 운치(?)가 있었다.
그리고 위 곡에서처럼 우리는 보름달이 제대로 뜨기를 기다리다가 달이 뜨면 근처 강둑에 나가 쥐불놀이를 하곤 했다. 깡통에 불을 놓고 빙빙 돌리면 차오른 달과 같이 붉은 원을 그리며 돌았다. 그렇게 깡통을 돌리고 달을 보면서 새해 소원을 빌기도 하고 다른 친구와 누가 크게 돌리나 내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작년에 이어 이번 정월 대보름도 코로나로 인해 모든 것이 물 건너가 버렸다. 달집 태우기 행사도 모두 취소되고 아이들의 쥐불놀이 같은 것은 옛날 전래동화에나 나오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오곡밥이나 나물 반찬도 찾아볼 수 없고 부럼에 귀밝이술 한잔 권하던 것도 옛날 일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을 코로나 때문이라고 할 수만은 없지만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게 된 영향이 가장 크다.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니 달집 태우기도, 쥐불놀이도, 오곡밥이나 나물반찬도, 부럼에 귀밝이술도 흥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혼자서 무슨 그런 일을 한단 말인가?, 그래도 사람들이 있고 이웃들이 있고 친구들이 있어야 그런 것들도 재미가 나고 흥이 나는 법이다. 가족들 간에도 정이 있고 우애가 있어야 그런 것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1인 가구에서 나 혼자 산다를 하고 있는데 무슨 정월 대보름 행사가 있단 말인가? 혼자서 무슨 흥이 난단 말인가? 창밖으로 쓸쓸하게 보름달을 보면서 혼술이나 하겠지.
영국에는 '외로움 장관'이 있다고 한다. 사회적 단절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매일 15개비의 담배를 피우는 것만큼 건강에 해롭다는 연구에 따라 외로움 문제를 담당하는 장관이 생긴 것이다.-오~ 놀라워라 영국이란 나라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무슨무슨 장관 같지 않은가?- 그리고 일본에서는 고독 담당실이 생겼다고 한다. '둘 다 섬나라라서 고독을 심하게 타는 건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도 알고 보면 섬나라와 비슷한 조건이다.(삼면이 바다인 데다가 북쪽은 휴전선으로 막혀 있으니 그럴 수밖에~) 그래서 그런 걸까, 최근 우리나라 통계지표를 보면 고독사 한 사람이 2016년 1,820명에서 2019년 2,536명으로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이며 2020년 무연고 사망자 수는 2,880명이라고 한다. 2020년 1인 가구가 616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30%를 기록해 인구통계학상 앞으로도 더 확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시대가 가속화되면서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고독사의 위험은 더 높아질 전망이다. 우리도 외로움 장관이든 고독 담당실이든 뭐든 만들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아니, 그런 장관이니 담당실이니 하는 것보다 예로부터 지켜온 전통을 코로나 시대에 맞게 되살리는 것이 더욱 확실한 해결책이 아닐까? 예로부터 달은 어머니, 모성의 근원이었다. 그 모성의 근원이 온전하게 부풀어 오를 때,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은 서로 교감하며 뛰놀았다. 습지와 물속 생명들이 그렇고 땅 위의 모든 동물들과 인간까지도 부풀어 오른 어머니 달 앞에서 서로 만나 교감하면서 하나 되는 희열을 맛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달집 태우기고 쥐불놀이고 강강수월래이고 이런저런 부럼과 음식들이다. 하지만 요즘은 모두가 아파트라는 1인 혹은 1 가족의 공간에 분리되어 그렇게 하나 되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외로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고독사가 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 가자, 달이 차오른다~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