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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마살 Jun 11. 2020

마음의 균형이 무너지다

나의 심리 상담 경험

가을 축제 때 혼자 뒤에 남겨진 그 순간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그것대로 또 두려웠지만, 더 무서운 것은 원래 알던 이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축제 때 다리를 절면서 억지로 뛰기 위해 애처롭게 절룩대던 나의 모습을 누군가 봤을 텐데, 나를 보면 그 모습을 떠올리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그리고 다들 나를 보며 ‘쟤는 왜 다리가 나을 거라고 하더니 아직도 절뚝거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나를 보기만 하면 ‘아직도 다리 아파? 왜 이렇게 오래가냐? 제대로 병원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등의 질문을 쏟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날 위한 질문 들이었겠지만, 제발 그만 좀 물어보라고, 관심 좀 꺼 달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물론 그럴 수 없었기에 대신 내가 숨었다.


그래서 그다음 학기부터는 학교에 가는 일수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학교에 가서도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죽음의 시간표를 짜서 정말로 ‘수업만’ 들었다. 남들에게는 ‘학교 너무 싫어서 공강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정말 힘들었다. 빨리 졸업을 하고 싶은 마음에 학점을 줄여서 듣지도 않았고, 당시 내게 휴학은 정도가 아니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휴학은 고려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 14, 15학점 들을 때 18학점, 6과목을 월, 화, 수 3일에 가득 채워 넣어, 6시 반이 넘게 끝 나는 9교시까지 들어가며 늘 배고프게 학교를 꾸역꾸역 다녔다. 수업이 있는 날들에 친구들을 점심 먹느라 보는 것 말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그마저도 3,4교시가 있는 날에는 밥 먹을 시간이 부족해서 대충 카페에서 혼자 음료로 끼니를 때우고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억지로 학교를 가지 않는 날에는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갔고, 그것도 하지 않는 날에는 집에만 있었다. 집에만 있는 날에는 많이 울었다.


내가 하는 것이라고는 학교에 다니고 병원에 가는 것 밖에 없었지만, 난 늘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있었다. 균형이 무너졌다. 아슬아슬하게 20살 때 부터 맞춰오고 있던 마음의 균형이 가을 축제 이후로 그대로 무너져버린 것이다.

 

다행인 것은 나는 나의 몸과 마음의 치료에 대한 의지가 아직 남아 있었고, 주변 가족들 역시 나의 치료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엄마의 추천으로 난생 처음으로 심리 상담 센터라는 곳에 가 보게 되었다.

심리 상담 센터에서는 내 얘기를 했다. 인간관계에서 주로 듣는 역할을 하는 나로서는 한 시간 내내 내 얘기로 세션을 이끌어나가는 것도 낯설었고, 내 수술 얘기를 남에게 꺼내는 것 역시도 너무나 낯설었다. 그래도 일단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 수술을 한 얘기, 예기치 못하게 수술이 잘못 되어 신경이 손상되어 수술 후유증으로 마비가 된 얘기, 장애가 남게 된 얘기, 다리를 저는 얘기, 대학에 가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아직도 다리를 절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얘기, 이제는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워 진 얘기.... 심리 상담을 받는 건 처음이라, 어떤 효과나 결과를 기대해야되는 건지 잘 몰랐다. 그냥 얘기를 하고 났는데 눈물이 났다. 가슴이 답답했다.


한 번은 다리가 부러진 동기 얘기도 했다. 동기 하나의 다리가 부러진 일이 있었다. 한동안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던 그녀는 계단을 오르지 못해서 다른 동기들에게 짐들 들어달라, 자신을 부축해 달라, 기다려 달라, 당당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몸이 불편한 건데 왜 당당하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 할까 생각했고, 당당한 그 모습이 부러웠다고 얘기했다. 나도 학교에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어려워서 동기들이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고, 나와 함께 이동할 때는 조금만 속도를 맞춰서 천천히 걸어줬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었다. 선생님은 그 동기와 나와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냐고 물으셨다.

“차이는 명백하죠. 그 동기는 다리가 잠깐 부러져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고, 저는 평생 아파야한다는 거죠.”


내가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아도 우리 둘 다 그 답을 알았다. 근데, 그래서? 잠깐 아픈 그녀는 왜 당당할 수 있고 평생 아파야 하는 나는 왜 당당하게 도움을 청하지 못했을까? 평생 아파야 하는 게,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아야 하는 게 창피해서? 그 땐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지금의 나는 그 답을 안다. 그 당시의 나는 ‘평생 아파야 하는 나’ 그 모습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 그게 현실이 돼 버릴까봐, 되돌릴 수 없게 될 까봐, 무서워서 나를 속이면서 내 거짓말 뒤에 나 스스로 숨었다.

상담은 그렇게 몇 번 하다가 그만 뒀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뭔가가 해결되는 기분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에게 얘기하면서 문제는 더 확실해졌다. 난 다리를 절룩거리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늘 균형을 잡으려 아등바등대고 남들에게 내가 아픈 것을 들킬까봐 가슴 조마조마해야하는 내 일상을 생각하면 가습이 답답하고 짜증이 치밀다가도 한없이 마음이 가라앉아버렸다.

나는 상담을 그만 뒀지만, 심리상담이 효과가 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 주위에는 생각보다 심리 상담센터에 다니는 지인들이 많이 있고,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본인과 맞는 상담사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것이 원래 화가 나고 답답한 일이지만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단다. 난 아마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내 답답함을 내가 못 이겨 그만 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내가 상담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은 있다. 나는 내가 종종 우울하고 사람을 피하게 되는 것에 대한 원인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어차피 나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절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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