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가 바보상자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 종일 TV만 보고 있으면 정말 바보가 된다는 어른들의 협박성 발언에 오래도록 TV를 보고 싶었으나 그래도 영구나 맹구 같은 바보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나라는 생각에 아쉬움을 무릅쓰고 TV 보기를 멈췄던 것 같다. 하기야 이제는 TV를 보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TV의 바보상자 역할이 예전보다 확연히 줄어든 것 같기도 하지만.
여러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어린아이들이 미디어를 통해 영상물을 시청하는 것이 두뇌 형성 과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훗날 언어능력뿐만 아니라 인지기능들을 약화시키므로 자연스레 학습능력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인데... 어렸을 때부터 공부 잘하신 학자 분들의 말씀이니 토를 달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그 학자 분들 본인의 아이들 키울 때 얼마나 TV를 안 보여줬을까 궁금하긴 하다. 집안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몸은 천근만근이라 아이랑 놀아줄 힘이 하나도 없을 때 TV처럼 고마운 존재가 어디 있을까? TV 덕분에 밀린 일도 하고 잠시나마 허리 펴고 누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한편으론 이런 자기 합리화도 해본다. 나도 어렸을 때 그렇게 TV를 봤는데 그렇다고 내가 뭐 얼마나 삐뚤어지게 자랐단 말인가? 얼추 사람 구실하고 손가락질받지 않고 살고 있으니 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어쩐지 TV보다는 책을 보여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인 듯하다. 우리 집의 경우엔 원체 아내도 TV를 잘 보지 않는 편이고 PD가 직업인 나조차도 집에서까지 TV를 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평일에는 TV가 켜져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이다. 그나마 주말이 되면 아이를 위해 가끔 틀어주는데 가능하면 TV를 안 보여주려고 하지만 그래도 스마트폰 보여주는 것보단 죄책감이 덜하니 피치 못할 상황에만 아주 가끔씩 TV를 보여주는 편이다. 그래도 나름 원칙을 세워 지키려고 했다. 'TV 시청은 주말 또는 휴일에만, 한 번에 한 시간 이내로' 가급적이면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을 했고 시간이 지나니 나중에는 아이도 어느 정도 수긍을 하고 따라 주었다.
어릴 때는 그래도 어쩐지 교육적일 것만 같은 EBS 프로그램들을 보여줬다. <방귀대장 뿡뿡이>나 번개맨이 나오는 <모여라 딩동댕> 같은 프로그램들. 아니면 IPTV를 통해 <뽀롱뽀롱 뽀로로>나, <로보카 폴리>, <꼬마버스 타요> 등의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유치원에 들어간 후부터 TV 채널 중에선 디즈니 주니어 채널을 즐겨봤는데 같이 보는 입장에서 내용의 재미 외에 배울 점도 참 많다고 느꼈던, '역시 디즈니는 디즈니구나'라고 느꼈던 <꼬마 의사 맥스터핀스>, <리나는 뱀파이어> 등의 애니메이션도 오래도록 즐겨봤다. 그런데 유치원을 지나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점점 머리가 커지니 EBS정도의 프로그램이나 유아용 애니메이션으론 만족을 못하는 느낌이었다. 아이도 자꾸 어른들이 보는 프로그램을 보고 싶어 했는데 고민 끝에 보여주기 시작한 프로그램이 바로 SBS의 <TV 동물농장>이었다.
매주 방송되는 것이 고마웠던 동물농장과 슈돌
아이가 동물을 좋아하기도 하고 어쩐지 교육에 해가 될 만한 자극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으며 방송시간도 일요일 아침이라 아이와 함께 앉아서 본방 사수하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물론 일요일 아침에 아이와 놀아주는 대신 조금이라도 더 누워있고 싶어 그런 것도 솔직히 인정한다.
아이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재미와 감동 그리고 정보를 모두 담은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하는 딸아이 입장에서는 귀여운 동물들이 나오는 것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고 보면서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사실 그리고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등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생긴 지 약 20년이 되는 장수 프로그램인데 나도 피디지만 매주 아이가 울고 웃으며 프로그램을 재밌게 시청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렇게 딸과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을 한주도 빠짐없이 만들어주는 제작진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10살 그러니까 10대에 접어들고 나니 <동물농장>에 조금은 시큰둥해지는 것 같았다. 다른 거 보면 안 되냐는 말을 자주 꺼내기 시작한 거다. 그래서 조금 더 어른의 맛이 추가된 그나마 착한 프로그램이 뭐 없을까 고민하다가 선택한 것이 KBS의 <슈퍼맨이 돌아왔다-슈돌>이다.
이 프로그램을 택한 게 된 건 딸아이의 의견도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오며 가며 우연히 <슈돌>을 보고 아이들이 귀엽다며 보고 싶다고 말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던 것이다. 외동 입장에서 동생뻘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콘셉트의 슈돌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역시나 나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 재미에 푹 빠지게 되었는데 특히 지금은 하차했지만 장윤정 도경완 커플의 딸 하영이가 나올 때면 예전 딸아이가 어렸을 적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맞아 저땐 저렇지' 하며 흐뭇하게 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마냥 보여줄 수 없는 이유가 생겼다. 약간의 부작용이라고 해야 하나? 딸아이가 아기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자꾸 보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혀 짧은 소리를 한다거나 응석이 늘어나는 등 소위 '아기 짓'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선가 <슈돌>도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 후론 지금까지 딱히 정해놓고 보는 프로그램은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시대 흐름에 맞춰 TV 프로그램을 보기보다는 넷플릭스를 통해서 아이들이 볼만한 영화나 해외 드라마를 보여주는 편인데 그것들이 좋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딱히 볼만한 그리고 보여주고 싶은 프로그램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딸아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직접 만든다면?
그러다 보니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게 된다. '딸아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내가 직접 만들어야 하나?' 몇 년 전에 직접 연출했던 프로그램 중에 <사심충만 오쾌남>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이돌들의 역사인식 문제가 사회 이슈가 되었던 시기인데 그런 사건들을 보면서 아이돌들에게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가르쳐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기획한 프로그램이었다. 출연하는 연예인도 재밌어하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진도 재밌게 만들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TV를 보는 시청자들은 그다지 재밌어하지 않아 프로그램은 15회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쉽게 끝이 나긴 했지만 그런 생각은 했던 것 같다. 나중에 세월이 지나 딸아이에게 보여줘도 창피하지 않은 프로그램을 만들었노라고.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을 PD 인생에서 출연진도 제작진도 시청자들도 그리고 딸아이도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까? 좋아하는 걸 넘어 딸아이 인생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아빠로서 만들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다른 건 모르겠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사춘기에 접어들 딸아이에게 외면을 안 당하기 위해 어떻게든 아이돌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해야 하는 건가? 그나저나 내가 앞으로 몇 작품이나 직접 연출을 할 수 있을까? 요즘 누가 TV를 본다고... 늙다리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오기는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