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부터 오래된 연식이 드러나 민망하긴 하지만 나의 첫 개인 통신 기기는 삐삐였다. 여기서 말하는 삐삐는 말괄량이가 아니라 무선호출기의 다른 이름이다. 혹시 당시 상황을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요즘 커피숍에서 주문한 커피가 나왔을 때 알림을 주는 진동벨 뭐 그런 거를 온 국민이 주머니 속에 하나씩 넣고 다녔다고 보면 된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처음으로 삐삐를 장만할 수 있었는데 미팅 나가서 상대방에게 집 전화번호가 아닌 삐삐 번호를 적어주며 우쭐했던 기억이 있다.
군대에 다녀와서는 알바를 해서 번 돈으로 처음으로 휴대폰이란 걸 장만하고 뿌듯한 기억도 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2G, 3G,4G, 5G 등 정확한 차이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숫자가 올라가면 뭔가 통신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을 알았고 전화기 모델은 플립폰, 폴더폰, 슬라이드폰 등으로 점차 진화하다가 급기야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의 세상이 오고야 말았다.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은 그야말로 필수다. 아니 필수란 말로도 모자라서 그 옛날 장자의 말처럼 스마트폰이 내 인생인지 내 인생이 스마트폰인지 헷갈릴 지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체 일부와 같아서 스마트폰을 놓고 외출한 날에 밀려오는 불안감과 초조함은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이럴진대 뭐든 습득이 빠르고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에게서 스마트폰을 떼어놓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부모들이 가장 흔하게 하는 행동이면서 동시에 죄책감을 갖는 행동 중 하나가 바로 아이가 어릴 때 식당에서 스마트폰을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2~3살 정도까지는 가족 외식 자리에서 부부가 동시에 밥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다. 한 명이 얼른 밥을 먹는 동안 다른 한 명은 아이를 케어해야 하고 다 먹자마자 바로 임무 교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정말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 되는데 얌전하게 있어줘도 힘든 마당에 아이가 칭얼대기 시작하면 정말 스마트폰 속 뽀로로의 도움이간절해진다.‘스마트폰 자꾸 보여주면 아이한테 안 좋다는데...’ 이런 찜찜함 속에서도 위기상황에선 어쩔 수 없이 꺼내야만 하는 비기 같은 것이 바로 스마트 폰이었다.
어린이집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아이에게 휴대폰이 그다지 필요하지는 않았다. 누르면 삑삑 소리도 나고 멜로디도 흘러나오는 장난감 휴대폰을 한참 갖고 놀다가 좀 지나서는 아빠가 오래전에 쓰다 서랍 한구석에 처박아둔 2G 폴더폰을 꺼내 자기 폰처럼 "어 여보세요 응응~ 나 지금 집이야'하면서 통화하는 상대는 도대체 알 수 없지만 누가 들어도 엄마의 흉내를 내며 통화 놀이를 하기도 했다.
아이의 첫 휴대폰은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
그러다가 처음으로 실제 휴대폰이 필요하겠다고 느낀 건 초등학교 입학 직후였다. 유치원 때까지는 부모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일이 많지 않지만 초등학생이 되는 순간 아무리 등하교를 함께 한다고 해도 조금씩 아이가 부모의 케어 범위 밖으로 벗어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럼 휴대폰을 장만해줘서라도 그 불안감을 해소하게 되는데 여기서 첫 번째 고민이 시작된다.
우리 아이 첫 휴대폰으로는 뭐가 좋을까? 아마 어린이 전용 미니폰, 시계형 휴대폰, 스마트폰 이 정도로 나뉠 거 같은데 각각의 장단점이 있겠지만 시계형이 휴대는 간편하지만 통화 등 사용이 불편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아직 스마트폰은 시기상조 아니냐는 현실적인 고민 때문에 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의 미니폰을 사주었더랬다. 처음에는 자기도 실제 통화가 되는 휴대폰이 생겼다며 그렇게 좋아했었다. 줄을 사서 하루 종일 목에 매달고 다니기도 하고 어른 흉내 낸답시고 뒷면에 그립톡을 붙이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모든 박탈감은 상대적일 때 더욱 강력한 법. 학년이 올라갈수록 부모와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휴대폰의 주요 기능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주변 친구들이 슬슬 스마트폰이라는 것을 사서 폰도 꾸미고 사진도 고화질로 찍고 게임도 하고 인터넷도 하는 모습을 보니 영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어른들도 스마트폰에 환장을 하는데 아이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유혹은 바로 카톡이었는데 어른들도 카톡이 없으면 실생활이 불편할 지경이지만 아이들도 이미 많은 부분에서 카톡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아이들끼리 단톡방 개설을 금지할 정도로 나름 규제를 하고 있었지만 그런 규제가 카톡 사용 자체를 막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참고로 아이가 쓰던 미니폰의 경우 문자메시지 그리고 부모와 연락할 수 있는 톡 기능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친구들이 쓰는 카톡이 안된다는 결정적이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계속 아이는 자기도 스마트폰을 사주면 안 되냐고 틈날 때마다 졸랐지만 아내의 대답은 노! 물론 현실적으로 2년 약정으로 묶여있어 3학년이 되어야 바꿔준다 그리고 그때 돼서도 스마트폰을 사줄지 그냥 폴더폰을 사줄지는 생각해봐야 된다 라고 못을 박았지만 한편으로는 학교나 학원에서 스마트폰을 하는 친구들 옆에서 쭈구리처럼 입 헤벌리고 친구들 스마트폰을 구경만 하고 있을 딸아이 모습을 상상해보니 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런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 '마침'이라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학원을 다녀오는 길에 딸아이가 '마침'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설마 그걸 일부러 잃어버릴 정도의 대담한 성격이 아니므로 추호도 의심은 하지 않았다. “덜렁대지 말라고 했지!” 라면서 부주의에 대해서 꾸지람을 하고 나니 바로 그다음에 현실적인 선택의 시간이 왔다.
아이의 두 번째 폰은 무엇으로 해줄 것인가? 한동안 인터넷도 뒤지고 대리점도 찾아다니고 하다가 내린 결론은 스마트폰을 쓰게 해 주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여러 고민이 있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스마트폰을 썼다가 나중에 스마트폰 중독이 되면 어쩌지?’, ‘SNS가 그렇게 문제라는데 아이들끼리 사용하다가 나쁜 물이 들면 어쩌지?’ ‘요즘 게임 이상한 거 많은데 혹시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게임에 노출되면 어쩌지?’ 등등
아이가 올바르게 스마트폰을 쓰게 하려면?
세상 모든 부모들이 할법한 이런 당연한 고민을 하다가 내린 결론은 바로 ‘시대의 거대한 흐름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청동기가 나왔는데 신석기를 쓰자고 고집하는 꼴이고 자동차가 나왔는데 마차를 타고 다니자는 말이고 이메일이 나왔는데 우표 붙여서 편지만 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분명히 언젠가는 스마트폰을 쓰게 될 텐데 참고 참았다가 갑자기 쓰게 됐을 때 예를 들어 중고생이 되어서 오히려 자제력을 잃으면 더 큰 문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사람들 다 쓰는데 스마트폰은 나쁜 거라며 혼자 안 쓰다 보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 되거나 더 나아가 자연스레 무리에서 외톨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또 어차피 쓸 거 눈에도 나쁘지 않게 큰 화면으로 보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못쓰게 할 게 아니라 쓰더라도 올바르게 쓰는 방법을 가르쳐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몇 가지 원칙을 세워보았다.
- 하루에 30분이든 1시간이든 정하기 따라 다르겠지만 일정 시간 미만으로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했다.
- 스마트폰을 쓸 때 눕거나 삐딱하거나 꾸부정한 자세가 아닌 똑바로 앉아서 사용하라고 했다.
- 게임은 아예 막을 수는 없으니 아빠 폰에 깔아서 하고 싶을 때 얘기하고 하라고 했다.
- 뭐든 꾸미는 걸 좋아하는 아이 특성을 고려해서 ‘스노우’와 같은 사진 어플은 깔아서 갖고 놀게끔 해주었다. 시간이 지나니 동영상 편집도 하고 싶다 해서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사용하게끔 했다.
- 카톡의 경우 엄마나 아빠가 모든 내용을 실시간으로 체크 가능하도록 해두었다.
-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더 나아가 요즘 아이들이 많이 쓰는 틱톡 같은 것들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조금 더 기다렸다가 사용하는 게 좋겠다고 말을 해두었다. 물론 “언니들이나 친구들은 다 쓰는데” 라며 섭섭해 하긴 했지만 사례를 들어가며 충분히 SNS의 위험성에 관해 설명해주며 설득했다.
물론 이런 원칙들이 좀 더 나이가 들어서도 그대로 지켜질지는 모르지만 또 때에 맞게 조정도 해줘야 하겠지만 최대한 자기 스스로 스마트폰 사용에 대한 통제력이 생길 때까지는 이 방법을 유지해보려고 한다. 하기야 엄마 아빠도 집에서 맨날 누워서 하릴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게 일상다반사인데 아이한테만 너무 높은 허들을 적용해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른 집들은 돈이 어디서 그렇게 나오는지 나도 못쓰는 100만 원이 훌쩍 넘는 최신 폰을 초등학생들에게 턱턱 사주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그대로 따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무튼 아이가 지금 쓰는 스마트폰은 얼마 전까지 아내가 쓰던 것이다. 기계를 깨끗하게 쓰는 편이라 거의 새거나 다름없는데 꼭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아이가 금방 또 잃어버리거나 부주의로 인해 액정이 깨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 새 스마트폰 사주는 건 다음으로 미뤘다. 물론 아이는 새것이건 중고 건 스마트폰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좋아하긴 했지만. 물론 얼마 전부터는 엄마는 폰 언제 또 바꿀 거냐고 무언의 압력도 넣기 시작했지만.
요즘은 거의 매일 저녁이 되면 아빠에게 카톡으로 하트가 잔뜩 들어간 이모티콘과 함께 “아빠 언제 와”, “보고 싶어”, “사랑해” 같은 내용을 보내기도 한다. 누군가의 카톡으로 단번에 기분이 확 좋아지기가 쉽지 않은데 그런 경험을 요즘은 거의 매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가끔은 자기가 너무 갖고 싶은 이모티콘이 생겼다며 아빠에게 엄마 몰래 톡을 보내오기도 한다. 그럼 스스로 사용할 이모티콘은 사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딸바보 아빠는 쏜살같이 결제를 하고 이모티콘 선물을 딸에게 보낸다. 최근 딸아이는 가끔 TV에 나오는 최신 아이폰이나 폴더블 폰 같은 광고를 보면서 “아~나도 저거 갖고 싶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요금 약정이 끝나는 5학년이 되면 아빠와 딸이 커플로 최신 폰을 사서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훨씬 더 딸과의 커뮤니케이션이 긴밀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