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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때 일은 할만해?
끊었다고 하더니 그새 못 참겠는지 담배 한 개비에 라이터를 대며 대견하다는 듯 여은정은 홍남이를 바라보았다.
- 너 담배 끊었다고 하지 않았어? 나 청소하는 곳도 담배 태우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큰일이겠다 싶더라. 다들 돈 벌어서 그것만 사나 봐.
요즘은 실내에서 흡연 금지가 당연해 생각도 못했는데 변호사 사무실의 공용 회의실 바깥의 작은 베란다는 예외인 모양이었다. 청소를 하려고 문을 확 열어젖히면 제일 먼저 담배 냄새가 그녀의 코와 폐에 훅 들어왔고 불쌍한 얼굴로 담배를 마저 태우고 있는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듯 얼른 담배꽁초를 끄며 수고하란 말과 함께 사라졌다.
‘이따가 올걸 그랬나’ 자기 때문에 긴 꽁초를 서둘러 끄고 가는 모습이 좋지 않았다. 홍남이도 꽤 골초라면 골초였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담배를 손에 잡는 익숙함이 어떤 건지 너무 잘았다. 모든 사람과 세상이 등 돌려 나를 외면한다 생각이 들 때 홍남이 손에 주어진 들린 자유는 술과 담배, 그리고 책이었다. 그것은 도피처나 다름없었고 몇 년째 저 여자가 남편 병수발을 들고 있다는 소문이 난 빌라 사람들에게 눈에 띄지 않는 세계의 것들이었다. 이 세 가지가 없었더라면 한 마디도 제대로 못 내뱉는 남편과 단 둘이 10년을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중 담배는 집 밖을 나가게 하는 유일한 보행 자유를 허락한 것이어서 한창 피울 때는 하루에 10번도 집과 밖을 들락날락하며 빌라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슈퍼마켓 정자에 오도카니 앉아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 화나고 짜증 나는 현실, 그렇지만 모든 걸 감내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뭉뚱그려 한숨의 연기에 삭이고, 다시 뱉었다. 숨이 안 쉬어지면 그렇게라도 들숨과 날숨을 한숨에 담았던 건 그래도 살아야만 했던 날들 때문이었다.
연기로 뿜어내는 그 마음들이 뭔지 잘 알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은 슬쩍 피하는 이곳 청소를 홍남이는 전담으로 담당했다. 어떤 사람은 소송이 뜻대로 잘 안 되어서, 또 어떤 직원은 자신의 의뢰인이 처한 상황이 너무 가여워 속상한 마음에 담배를 찾기도 하는 곳. 이 큰 빌딩에 3평도 안 되게 허락된 구원의 장소 같은 곳이었다.
- 야, 아까 새까맣게 어린 후배년이 나한테 뭐라는 지 알아? “아줌마 목소리는 담배 때문에 그런 거죠?”라면서 아주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실실 쪼개며 물어보는데 열이 또 확 오르지 뭐야. 아니 내가 지 엄마, 하다못해 이모 뻘인데 말이야.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해? 그래서 그냥 웃고 넘기려고 하다가 “아니, 담배 때문에 아니고 너처럼 버릇없는 애들 교육하다 그런 건데?”하고 톡 쏘아붙였더니 조감독이 와서 나한테 말 좀 조심하라고 하더라. 그 여자애 요즘 잘나가는 신인이라 다 비위맞추느라 축난다고. 나 참. 이게 내가 조심해야 할 일이야?
육십 세 여은정. 조연 배우 중에서는 꽤나 알려진 그녀는 이혼 후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억척스럽게 방송에서 살아남은 중년 탤런트다. 배우 호칭은 좀 과하고 TV 일일 드라마에서 젊은 주인공 엄마의 친구 역할로 많이 나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바로 아는 척하기에는 머쓱한, 그러나 평소 차림이 화려한 그녀이기에 한 번씩 눈길을 주게 되는 그런 위치의 중년 조연 탤런트였다.
처음 배우를 꿈꿨을 때는 로맨스 여주인공이 되리란 희망을 안고 그 깡촌 시골에서 도망치듯 상경했지만 본인도 객관적으로 파악한 자신의 낮은 코와 쫙 찢어진 눈매 때문에 주인공의 친구 역할로만 머문 운명이었다. 그나마 연기를 곧잘 했고, 일찍부터 엄마 역할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어 드라마 조연으로 꾸준히 캐스팅되었고 이혼 후 아들의 교육을 위해 악착같이 일하면서 나이 오십 줄에 들어 점점 빛을 발하더니 요즘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동안 얻지 못한 우아한 중년 여성 탤런트의 타이틀로 뜨고 있는 중이었다.
홍남이에게는 유일한 고향 친구였고 어릴 때부터 끼가 특출해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는 홍남이에게 “야, 무슨 결혼을 이렇게 빨리 해. 아무리 남자가 좋아도 그렇지. 네 인생 여기서 끝낼 거야?”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정도로 자신의 세상을 화려하게 건설하려는 야심 있는 여자였다.
야심. 까딱 한 발자국이라도 선을 넘으면 욕심으로 비치는 이 마음은 자신이 그어 놓은 선명한 바운더리 안에서 배우로서 인생의 승부를 보겠다고 결심한 여은정의 남성다운 욕망이었고 그녀의 모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반면 홍남이에게도 야심이 있었다. 여은정과는 결이 매우 다른. 매일 싸우는 부모님 밑에서 둘째 딸로 커 온 환경은 그녀가 좋은 가정을 만들어 빨리 이 집을 나가는 것이 최선의 욕망이었기에 스물셋 어린 나이에 남편과 결혼하는 일만이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친구였지만 이 둘이 단짝으로 40년 넘게 지낼 수 있었던 건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진리를 몸소 깨우치는데 별다른 시간이 들지 않아서였고 그 사실에서 서로를 쉽게 동정하지 않는 우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 할지라도 인생의 무게를 감히 헤아리지 않고 앞으로 홀로 걸어야 할 길에 선 친구를 멀찍이 바라볼 뿐이었다. 여은정이 이혼을 했을 때도, 홍남이가 사별을 했을 때도 그 둘은 서로의 처지를 함부로 불쌍히 여기지 않았고 어떻게든 밥을 먹이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다. 그건 모성이었을 수도, 사랑이었을 수도, 우정이었을 수도 있지만 결국 상대의 바뀐 운명을 인정하는 깔끔한 성정에서 나온 배려였다.
전업주부 홍남이에게 일이라는 건 생존과는 거리가 있었다. 매일 출근할 때 입는 남편의 와이셔츠를 잘 다리고 청소와 빨래를 미루지 않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족들에게 배불리 먹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지만 그것이 최선이고 최고의 삶이라 믿었다. 연금보험을 들고 한푼두푼 모아 대출원금을 마련하고 조금씩 평수를 넓혀 좋은 집으로 이사 가는 일이 그녀가 바란 인생 자체였다. 그런데 나이 육십 줄에 들어 처음 사회의 ‘일’이라는 걸 해보니 만만치 않게 드는 체력과 머리에서 굴려야 하는 일 센스, 즉 일머리라는 게 필요했다. 여러 사람의 기준을 맞추는 동시에 나의 중심도 있어야 오래 일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말하고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려고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어깨와 허리 통증이 날로 심해져 병원 신세를 지면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피해를 줘야 했고 따가운 눈총과 빈정거림이 배로 돌아왔다. 청소하는 일에도 요령이 있어야 하는 걸 깨달았고 자신이 맡은 공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전략이 일의 강약을 조절하는 것임을 체득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은 그저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게 최선은 아니라는 걸, 이 나이에 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