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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과 주황빛이 버무려져 부엌 찬장 아래로 깊이 들어오는 저녁. 홍남이는 무겁게 현관문을 열어 슬리퍼로 갈아 신고 냉장고 안에 반쯤 먹고 남겨 놓은 차가운 소주를 꺼내 와인잔에 가득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가벼운 두통과 심란한 마음을 재빠르게 진정시키는 유일한 위로제인 술은 홍남이가 세상밖으로 꺼낼 수 없는 악독한 취미이자 홀로 살아가야 할 세상을 견디는 조용한 희망 같은 것이었으므로. 이제는 세상에 나가기 위해. 그 희망을 두 주먹에 꽉 움켜쥐고 절대 놓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안 해보셨네요?
- 네. 아이 돌보는 일만 잠깐 해봤어요.
- 몸 쓰는 일인데 오래 하실 수 있겠어요? 우리는 최소한 6개월은 같이 일할 사람을 구하고 있거든요. 일용직 사무실이긴 해도 여기 청소는 워낙 소수가 오랫동안 한 건물에서 일한 사람들이라 좀 깐깐하기도 해서요.
— 돈 받으면서 청소해 본 적은 없지만 전업주부로 살면서 집 건사하는 건 충분히 해봤으니 기술만 배우면 오래 할 수 있을 거예요.
이 말이 과연 저 남자의 마음에 들까 싶었지만 더 이상 지어낼 말도 없고 딱히 하고 싶은 말도 없어 홍남이는 시계 한가운데 나 있는 점을 보며 마시다 만 믹스 커피가 담긴 종이컵 입구를 매만졌다.
- 그럼 일단 내일 한번 나와보세요. 이 주소로 가면 청소반장이 잘 알려줄 겁니다.
갑자기 일을 시작하게 된 홍남이는 기분이 얼떨떨했다. 당장 내일 새벽부터 건물 청소를 하게 되었으니 당연했지만 평생 사회생활이라고는 해본 적 없이 나이 육십을 넘어 덜컥 세상에 던져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한편으론 돈을 벌 수 있어 우쭐한 기분도 들었지만 어떤 사람들과 일하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도 컸다. 유일한 친구였던 남편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크게 비웃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편이 시큰하게 아려왔다. 이젠 시시콜콜 별일 아닌 것들을 전화로 일러바칠 사람이 없는 부재감이 더욱 쓸쓸하게 느껴졌다.
- 나야. 전화통화 가능해? 나 내일부터 청소 일 시작하게 됐어.
- 내일 당장? 아니 뭐 그렇게 빨리돼? 다들 취직 안 돼서 뉴스에 나오는 건 뭐였던 거니?
- 그거야 젊은 사람들이 일 다운 일 해보려고 찾는 직업이고. 나는 내 나이밖에 못 하는 청소잖아.
대본을 외우느라 정신없던 여은정은 자신의 제일 친한 친구가 이제야 독립을 하는 것 같아 대견스러우면서도 본인 자식을 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걱정되는 마음을 감출 새 없이 축하인사를 건넸다. 남들은 백세까지 살까 봐 전전긍긍한다는데 홍남이 남편은 너무도 한창인 나이에 친구를 두고 먼저 갔다. 어쩐지 처음 인사시킬 때부터 마음에 안 든다고 퉁퉁거리던 여은정이었지만 친구가 그이를 보며 너무 좋아하고 편안해 보며 더 이상 긴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일찍 가버릴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이 곁에 친구를 놓아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혼한 자기 처지나, 사별한 친구 처지나. 신이 있다면 핀셋으로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 속에 우리 둘만 콕 집어 불행의 땅 위에 얹어 놓은 것 같았다.
-축하한다야. 나이 육십에 첫출발을 하네.
홍남이의 남편 병수발은 자그마치 10년을 꼬박 채웠다. 처음엔 뇌출혈로 쓰러져 몸 한쪽이 마비되더니 점점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거의 죽을 때가 되어서는 눈만 끔뻑거리며 하루하루를 버티던 세월이었다. 홍남이는 유난히 남편과 정이 두터웠지만 긴 병 앞에 효자 없다고 자식도 없이 홀로 그 시간을 감당하던 세월은 남편에 대한 안타까움이 야속함으로 바뀌었고 뒤늦게는 미움과 증오로 치닫는 시간이었다. 젊었을 적 쌓아놓은 애정과 의리가 두텁지 않았더라면 아마 몇 년도 버티지 못하고 현관문 밖으로 나가 다시는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건강했던 남편은 홍남이에게 둘도 없는 친구처럼, 든든한 아빠처럼, 철없는 아들처럼 많은 역할을 해냈고 자식 없는 평생의 삶을 이 사람에게 의지해 살아봐도 나쁘지 않겠단 확신을 줬다. 그 확신은 어쩔 도리 없는 운명의 지독한 모습을 하고 점차 지워졌지만.. 지난했던 십 년은 그녀에게 벌이자 불행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의 홀가분한 마음을 생생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 그쪽이 오늘 새로 오신 분? 나 여기 반장이에요.
풍채가 크고 단단한 골격을 자랑하며 사람 좋은 웃음으로 먼저 인사를 건네는 청소반장은 이 구역에서 일한 횟수만 15년이 넘는 베타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청소 영역 분배를 넘어 고용인과 피고용인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중재하고 부당한 일에는 적절한 분노로 객관적인 방식을 갖춰 따져 물을 수 있는, 보기 드문 중년의 활기를 가진 여성이었다. 홍남이에게 첫 청소 구역을 정해주고 함께 일할 사람 몇몇을 소개해주며 “여기서는 시간 엄수가 신이에요. 단 1분이라도 늦거나 제때 청소를 마치지 못하면 당장 끝입니다.”라고 강조하며 말했다. 그 모습에 잔뜩 기가 눌린 홍남이었지만 어차피 지금 집에 돌아가는 것도 창피한 일이었으니 애써 다독이며 불안한 눈빛을 사무실 여러 곳에 힘주며 노려 보았다.
새벽 5시 30분. 서울의 작은 빌딩 5층에는 카페, 병원, 약국이 들어서 있고 홍남이가 맡은 청소 구역은 약 10명의 사람들로 움직이는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 여기가 스페이스는 작아 보여도 사람들마다 책상이며 서랍, 휴지통이 각자 자리에 한 개씩 있고 공용 회의실까지 들어차 있어서 청소할 때 꼼꼼하게 해야 해요. 특히 여기는 서류 종이가 많은데 함부로 버리면 진짜 큰일 나니까 땅에 떨어져 있어도 일단 한쪽으로 모아 놨다가 웬만하면 사람들한테 확인받고 버리는 게 나아요. 확실하게 버릴 건 저쪽 큰 상자에 따로 두니까 저건 그냥 한꺼번에 파쇄하면 되고요.
반장은 손가락으로 구석구석을 가리키며 바닥뿐 아니라 책상, 창틀, 액자까지 이 공간에 있는 모든 것들을 깨끗하게 관리하고 반짝이게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변호사 사무실이기 때문에 외부 손님들이 많이 들락날락 거리는 일이 많아 외부 먼지도 많지만 그들에게 변호사 사무실의 위엄을 잘 보여야 한다고. 그건 변호사들의 업무처리 방식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결국 얼마나 그 장소가 깨끗하고 청결한지에서부터 인상이 결정되는 거라고 소리 죽여 말하는 반장의 입에 은근한 자부심이 감돌았다.
출근 첫날. 같이 일하게 된 선배와 함께 번호키를 누르고 딸깍, 문을 열어 변호사 사무실에 발을 들였을 때는 출근시간 전이라 아무도 없었다. 막 동이 트려고 하는 아침의 해가 사무실 한쪽 고요히 눈감고 일어나려고 하는 책상을 비추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기 직전까지 머금은 먼지와 습기, 두터운 사람 냄새가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오는 듯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세상 작은 구석에 서 있노라니 갑자기 삶의 의욕이 불쑥 올라왔고 손에 걸레만 쥐어주면 누구보다도 이 회사를 세계 제일의 변호사 사무실로 만들 자신이 들었다. 스스로 감지한 이상한 용기에 깜짝 놀랐지만 오랜만에 가져보는 살아있는 감각과 활기가 싫지 않았고 매일 누워서 나만 바라보던 남편의 눈빛을 마음속에서 조용히 물리치며 이제 혼자서도 잘 살아보겠노라고 다짐했다. 어쩌면 하늘에서 자기를 흥미로운 눈으로 보고 있을 남편에게 선언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느새 선배는 창문을 다 열어 환기시키며 책상 아래 쓰레기통을 비우고 있었고 홍남이에게 막대걸레를 주며 입구 먼 곳에서부터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닦으며 입구 쪽으로 내려오라고 지시했다. 집에서는 써 본 적 없는 물걸레의 물기가 바닥에 흥건히 젖어 있는 걸 보자니 앞으로 청소하는 기술과 센스를 몸으로 터득해 나가야만 할 것 같았다. 자신은 물걸레의 물 하나도 깨끗하게 짜지 못해서 몇 번이고 다시 바닥을 닦고 있는데 선배의 움직임은 마치 고요한 호수 속에 떠 있는 백조처럼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효율적으로 움직여 불필요한 동작과 동선이 전혀 없었다. 무뚝뚝하면서도 새침하게 자기 할 일만 빨리 하는 사람이었지만 홍남이에게 여럿 말로 자신의 노하우를 무심히 툭 말해주기도 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 사이 정신없이 닦고 쓰는 와중에 마음에 남는 말이 있었다. 어둡고 침침한 작은 구석일수록 반드시 깨끗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 저기 작은 구석 틈 같은 곳 아무도 안 볼 것 같죠? 물론 아무도 모르고 지나갈 때도 많아요. 그런데 꼭, 언젠가는 반드시 저기가 문제가 되더라고요. 지금은 괜찮다고, 아무 일도 없다고 넘겨도 괜찮은데 어떤 사람이 갑자기 저곳을 지적한다거나, 어느 날 장마 때 누수가 되기도 하고, 벌레가 잔뜩 꼬일 때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청소하면서 작고 어둡고 침침한 구석일수록 머리 한번 더 숙이고, 허리 한번 더 숙여서 반드시 확인해요. 작은 불씨가 큰 집을 태울 때가 있으니까요.
변호사 사무실 청소를 끝내고 건물 비상구 계단에 앉아 삶은 달걀 한 개를 주면서 당부하던 선배의 말을 들으니 신기했다. 꼭 삶과 비슷한 것 같아서.
자신이 쉽게 놓쳐 버렸던 일이 지금 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생각하면 젊은 날의 자신이 너무 어리석게 느껴졌다.
젊어서 아쉬운 게 없던 시절. 청춘이라 시간을 버리는 게 당연했던 시절. 내 인생에 대해 나 말곤 아무도 간섭해선 안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모든 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젊음날의 어리석음은 어쩔 수 없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홍남이는 여전히 그 시절의 작은 틈,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못 본척 해 버릴 것만 같았다. 청춘은 원래 즉흥적으로 이뤄진 선택에 삶을 비밀을 드러내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