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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Apr 01. 2019

'사진' - 「어느 아주 어린 날에」

회사원은 어느 날 아주 어린 날의 꿈을 꾸었다

  회사원은 사무실 책상에 갖가지 사진을 가져다 놓곤 한다. 우리에게 책상 위 사진은 마음의 작은 위안이 되어 준다. 제주도 바다를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는 커플, 자기의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두고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개, 생전에 한 번은 가보겠다는 일념으로 몇 년째 책상 위를 지키고 있는 유럽의 어느 도시. 불쾌한 모습투성이인 사무실 안에서 잠시나마 눈을 쉬게 해 줄 수 있다면 사진은 어느 것이든 좋다. 아슬아슬한 옷차림의 걸그룹 사진도 나쁘지 않겠다.

  

  때로는 사진을 보며 동기를 부여받고 의지를 다시 다지기도 한다. 볼이 터질 듯 빵실빵실한 딸아이의 사진을 보는 회사원은 딸의 얼굴에서 위안을 얻으면서 동시에 개처럼 벌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딸은 절대로 회사원으로 키우지 않겠다고도 생각한다.

  

  우리는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사진을 붙여놓는 것이다.

  

  책상 위가 어지러운 것이 싫은 나는 사무실 책상에 아무것도 붙여놓지 않았다. 마음의 위안과 동기 부여는 그저 칼같이 회사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충전이 되는 법. 집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오직 한 장의 사진만을 책상 위 벽에 붙여 놓았다. 말뚝을 옹골차게 쥐고 선 아기적 내 모습이다. 자기애의 발현이 아니라 엄마가 붙여놓았고 귀찮아서 떼지 못하고 있다. 회사원이 될 거란 미래는 까맣게 모른 채 아기의 얼굴은 싱글벙글이다.

  

  나는 저것이 커서 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을 수 없다.




  어느 아주 어린 날에

  

  나는 작은 나무 말뚝을 잡고 있었다.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을 낮은 높이의 말뚝. 그러나 왠지 커다랗게, 어깨 높이까지 올라와 있었다. 말뚝에 올린 손이 조그맣고 연약해 보였다. 연하고 보들보들한 살갗이 손 등 위로 도톰하게 올라와 있었다. 하얀 솜털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래, 햇빛. 아주 화창한 날씨였다. 나는 화창하다는 단어도, 날씨라는 개념도 잘 알지 못했지만 이렇게 눈이 부시도록 빛이 사방을 가득 채우면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는 것은 잘 알았다. 빛에 달궈진 따뜻한 공기가 통통한 볼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면 내 볼도 마음도 발그레하게 달아오르곤 했다. 작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빛을 쫓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두색의 작은 풀들이 땅 위에 가득 자라서 내리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어른들과 아이들이, 가끔은 내 또래의 작은 아이들도 풀 위에 자리를 깔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엉덩이를 씰룩이며 그곳으로 발을 한걸음 내딛자 커다란 손이 나를 잡고 안아 올렸다.

  

  

  안아 올려진 그곳에는 나를 닮은, 아니 내가 닮은 남자가 있었다. 아침에 잘랐을 수염이 푸르게 다시 올라오고 있는 어른 남자의 얼굴. 그 얼굴이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수십 년이 지나고 내가 똑같이 지어 보일 그 웃음을 보며 나는 벅차오르고 한없이 기쁘고 또한 들뜨고 설레서, 그의 뺨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마구 때렸다. 연약하고 미숙한 성대를 지나 자그마한 얼굴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아기의 가슴이 들썩이며 웃는다. 작은 손에 연신 얼굴을 맞은 그 역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작은 손에 숨겨진, 언젠가는 그를 능가할 만큼 억세고 굵어질 미래를 확인하며 그는 뿌듯했다.

  

  억센 손에 안겨있는 나를 향해 젊고 앳된 여자 둘이 다가왔다. 아마도 그의 회사 동료, 부하 직원일 그녀들은 그에게 안겨 있던 내 볼을 가볍게 꼬집고 실뭉치처럼 작고 보드라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낯선 이의 등장에 경계했다가 그녀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며 긴장을 풀었다. 그녀들이 그에게 몇 마디를 묻고 꽃망울이 터지듯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가식도 꾸밈도 없어서 보는 이의 마음도 즐겁게 하였지만 나는 왠지 재미가 없어져서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그때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내 이름이 무엇인지 누군가 내 눈을 바라보며 몇 번씩 불러주어야만 겨우 인지할 수 있었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단번에 나를 부르는 것임을 알았다. 더 옛날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부터 나를 부르던 목소리였고 바깥이 궁금해서 나를 둘러싼 벽을 두드릴 때마다 대답해주었던 목소리였고 이윽고 밖으로 나와 쏟아지는 세상의 빛에 놀라 울음이 터졌을 때 나를 달래주었던 목소리였다. 크고 다정한 그의 손에서 벗어나 목소리를 향해 걸었다. 느리고 미숙한 걸음으로 기우뚱거리며 마주할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그 얼굴을 보았을 때 어린 가슴을 터질 듯 두드리며 튀어나올 벅찬 환희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불현듯 찾아온 이 어린 날의 기억을 장식할 대미. 언제나처럼 계속 그럴 것인.

  

  엄마가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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