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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Aug 05. 2019

'사랑' - 「운 좋은 남자가 곰에게 자랑하다」

회사원은 운 좋게도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다

  당연하고 뻔한 이야기지만 회사원도 사랑을 한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좀처럼 바닥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통장 잔고에 한숨 쉬더라도 우리는 사랑을 한다. 일 때문에 사람 만날 시간도 없어요,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겠지만 사실 우린 일에 대한 보상으로 사랑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치고 찌든 모습도 사랑해주는 그녀(혹은 그)라도 없다면 세상은 너무 넓고 싫은 인간들이 너무 많다. 사랑은 종종 모래사장에 그려놓은 그림처럼 허망한 것이기도 하지만 찰나의 기쁨도 영원의 추억이 되어줄 수 있는 법이다. 어차피 지금 회사원이라면 앞으로 50, 60년도 안 남았다.

  

  회사원의 연인은 대체로 회사원인데 그것엔 장점이 아주 많다. 퇴근 10분 전에 소집되는 회의와 금요일 밤에 통보되는 회식에 함께 울분을 토해줄 수 있는 건 같은 회사원 연인뿐이다. 대표가 해외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다는 소식을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 것도 회사원 뿐이다. 10분 남은 점심시간에도 기어이 카페에 가 커피를 마시는 우리를 이해해 줄 수 없다면 곤란하다. 나의 연인이 회사원이라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닌가.

  

  회사에 속박된 채 회사를 욕하며 사랑을 키워온 회사원 연인에게 수줍게 카드를 썼다. 카드에는 달 아래서 서핑을 하는 곰을 끌어다 놓아서 부족한 글솜씨를 감추었다.




  운 좋은 남자가 곰에게 자랑하다

  

  그날 밤, 서핑을 하던 곰이 있었습니다. 밝은 달이 둥실 떠오른 밤하늘 아래서 노란 서핑 보드를 즐겁게 타던 곰은 갑자기 심술이 났습니다. 멍청한 낯을 한 인간이 저보다 훨씬 행복한 얼굴로 해변을 걸어가고 있었거든요. 남자의 얼굴은 대낮처럼 밝은 달빛보다 더 환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유후, 유후. 어이, 거기 바보 같은 남자야. 이 밤중에 어딜 그리 바삐 가는 거지? 그런 멍텅구리 같은 낯짝을 하고서 말이야."

  

  곰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남자는 고개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 모습에 곰은 더욱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곰은 윤기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다시 물었습니다.

  

  "유후, 유후. 여기야, 여기. 여기를 봐. 멍텅구리 같은 인간 남자야. 파도를 타는 곰이라면 놓치기도 어려운 광경이겠고만 왜 못 본 척을 하고 그래?"

  

  그제야 남자는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가 파도를 타고 있는 곰인 것을 알고 다가왔습니다. 가까이 온 남자의 얼굴은 기쁨이 넘쳐서 소금처럼 하얀 백사장보다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저를 부르셨나요, 곰님?" 남자가 공손하게 물었습니다.

  "그래, 인간 남자야. 서핑을 타는 곰이라니,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가득이겠지만 잠시 접어두고, 내 질문에 답부터 하렴."

  "곰도 서핑쯤이야 탈 수도 있겠죠.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걸요."

  "쓸데없이 쿨한 녀석일세. 마음에 안 들어."

  "그렇단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나저나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곰님? 제가 좀 바빠서 빨리 질문해주시면 좋겠는데요."

  

  남자가 정말 바빠 보였기에 곰은 얼른 답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싱글싱글 행복이 배어 나오는 미소를 한 남자에게 곰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세 번이나 물어보았던 것 같은데. 아무튼, 지금 그런 멍청한 낯을 하고 어딜 그리 가고 있는 거야?"

  

  "아, 그게 궁금하셨던 거군요!" 남자의 미소가 한층 더 커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곰은 조금만 더 크게 웃었다간 입꼬리가 찢어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내가 직접 찢어버리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죠. 까만 눈 안에 숨은 불꽃을 알리 없는 남자는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지금 그녀를 보러 가고 있습니다. 아, 그녀는 물론 제가 사랑하는 연인인데, 오늘은 그녀와 600일이 되는 날이거든요."

  

  곰은 하마터면 보드에서 균형을 잃고 떨어질 뻔했습니다. 초콜릿 파이 같은 코를 크게 벌름거리며 곰이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너처럼 바보 같은 남자를 600일이나 만나주는 여자가 있다고? 너 무슨 약점이라도 잡고 있는 것 아냐?"


  남자가 크게 웃었습니다. 그 소리에 다시 바다에 빠질뻔한 곰은 남자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렸습니다.   "이봐, 이봐. 조심 좀 하......"

  

  "약점을 잡고 있다뇨. 그런 것은 없습니다." 웃음을 뚝 그친 남자가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저 그녀가 관대하고 한없이 후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가 잘한 것은 하나도 없죠. 항상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600일의 하루하루를 어제처럼 선명하게 기억하는 듯 꿈꾸는 표정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곰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흥. 이 멍텅구리 같은 사내의 얼굴이 밝은 건 마치 복권에 당첨된 인간의 얼굴 같은 거로군. 별것 없던 인생에 든 한줄기 햇살이 마냥 기쁘고 행복한 거지.'

  

  이야기를 마친 남자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며 꾸벅 인사를 하곤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다시 길을 재촉했습니다.

  

  곰은 문득 밤바다 위에 혼자 둥실 떠있는 것이 지겨워졌습니다. 서핑 보드를 타고 파도 위를 주르륵 하염없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도 서글프게만 느껴졌습니다. 윤기를 잃은 까만 코를 슬프게 씰룩이며 곰은 멀어져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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