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은 커피를 주문하다 겨울이 온 것을 알았다
회사원에게 겨울은 어떤 계절? 누군가는 하얗게 보슬보슬 내릴 하얀 눈을 기다릴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길 위를 가득 메울 캐럴 음악에 가슴 두근거리는 계절일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연말 정산에 허덕이고 금년도 결산에 골치 아픈 계절일 수도 있겠다. 6시만 돼도 사위가 어둡고 짧은 숨 한 번에도 차가운 공기가 허파 가득 들어차는 추운 계절. 우리는 각자의 마음가짐으로 겨울을 맞는다.
아직도 교과서는 - 우리 때에는 슬기로운 생활이었는데 - 우리나라를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로 소개하고 있나? 대한민국 교육계의 굼벵이 같은 변화 속도야 유명하지만, 아직도 사계절 따위를 운운하고 있다면 게을러도 너무 게으른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두 개의 계절과 두 번의 환절기가 있다고 고쳐져야 한다. 봄과 가을은 그 유약한 이름만큼이나 유명무실해졌으니까.
겨울은 해가 지날수록 빨리 와서 무겁게 자리를 지킨다. 의류 매장에서는 가을 옷을 매장에 배치하지 않고 곧장 겨울 시즌 준비를 하는 경우도 생겼다. 겨울은 우리에게 한가롭게 프렌치 코트를 입고 멋부릴 여유를 주지 않는다. 목까지 올라오는 것이 버거웠던 패딩은 이제 무릎을 넘어 정강이까지 덮게 되었다. 입는 침낭이 나올 날도 멀지 않았다.
계절의 변화에 별 감흥이 없는 회사원이지만 우리에게도 선호는 있다. 나는 여름을 사랑하고 겨울을 증오하는데 이건 긴 생머리에 얼굴이 하얀 여자를 좋아하는 취향만큼이나 뚜렷한 계절 선호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것을 느낀 것은 카페에서 빨대를 버릴 때였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요."
얼굴이 작고 동그란 개구리를 닮은 점원이 순간 멈칫했다. 아마 습관적으로 '아이스' 항목에 체크를 했던 것이리라. 체크를 해제하고 실수한 적 없다는 듯 방긋 웃으며 되묻는다. "따뜻한 것 말씀이시지요?" 멋진 미소다. 상당히 오래 이쪽 계통에서 커리어를 쌓은 - 단골손님과 이런저런 신변잡기로 능숙하게 대화를 끌어낼 수 있는 - 것 같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대답을 기다리는 점원을 보며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그치? 너도 추워진 것이 참 갑작스럽지? 개굴.
이윽고 커피가 나오고 스무스하게 걸어가서 수백 번은 반복했을 행위를 반복한다. 가벼운 목례, 정중하게 진동벨을 건네고 커피를 받고 빨대를 꺼내 비닐을 입으로 뜯어 벗기고 휴지 세 장을 챙긴다. 자, 이제 내 자리로. 유연하게 돌아서기만 하면 되는데 가만. 뭔가 잘못되었다. 일요일인데 7시에 일어났다거나 자려고 누웠는데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지 않았다거나 하는, 대수롭지 않지만 명백한 실수. 빨대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 속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꽂혀 있었다. 같은 실수를 저지른 나를 보며 아까의 점원이 볼 한쪽을 씰룩이고 있다. 개굴.
빨대는 버려져야 했고 나는 정신없는 사람 취급을 받아야 했고 날은 추워졌다. 가을은 색이 바래기 시작하고 있었다. 정규 교육을 통해 심긴 고정관념대로 갈색 혹은 노란 때깔일 가을은 채도가 점점 낮아져 조만간 무채색이 될 예정이었다. 버버리 코트의 계절이라고 상투적인 문장을 쓰기가 무섭게 롱 패딩을 꺼내 입어야 할 것이다. 가을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이미 뗐고 일어서기가 무섭게 퇴장할 것인데, 계절의 왕좌가 누구에게 갈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나는 빨대를 구겨서 버렸다.
겨울이 싫다. 플라스틱 빨대의 사용이 줄어들 테니 환경 단체는 기뻐하려나? 나는 겨울이 싫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빵, 수십 년째 차트를 오르내리는 팝 가수의 캐럴 음악들, 솜털처럼 흩날릴 눈송이와 귀가를 서두르다가 날리는 눈송이를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젖은 눈빛들이 우릴 기다리지만 나는 겨울이 싫다. 아침 지하주차장에 내려가 밤새 얼어붙은 냉기가 감도는 운전석에 앉아야 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겨울은 싫은 계절이다.
내가 싫거나 말거나 겨울은 착실히 걸어온다. 어울리지 않게 잰걸음이다. 주문을 받던 점원이 또다시 멈칫했다. 앞으로 일주일은 되어야 적응이 될 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