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을 어른으로 만든 것은 순전히 엄마의 밥이었다
우리는 왜 회사원이 되었을까? 딱히 먹고 살 다른 길이 없어서요. 밥 멀어 먹고살려면 이거라도 해야 해서요.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요. 표현은 제각각이겠지만 결국 답은 하나다. 밥.
우리가 회사원이라는 회사의 자발적 노예가 된 것은 밥 때문이다. 나는 돈벌이라는 말보다 밥벌이라는 말이 더 좋은데, '돈을 번다'라는 말이 더 많은 가능성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밥을 번다'라는 말이 훨씬 더 근본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라 하신 것을 보면 신의 아들도 삶의 근본이 밥에 있음을 알고 계셨던 것이리라.
나는 한때 자소서의 지원 동기에 '밥을 벌기 위해서'라고 쓰던 적이 있다. 그리고 쓰는 족족 떨어졌다. 회사란 점잖을 가장하고 본질을 외면해야 한다는 규율이라도 있는 것인지, 나의 진심은 항상 외면당했다. 그들이 원하는 지원 동기란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나 1등 기업을 만들기 위해서라든가 따위일 텐데 그건 다 허울이고 허상이다. 솔직히 울 엄마가 계속 밥만 해준대도 너네 회사 지원할 생각도 없었어, 이거 왜 이래?
회사의 머슴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어린 날, 영어도 잘하는 머슴이 되기 위해 캐나다에 갔다. 춥고 배고팠던 그날의 기억, 캐나다에서 배운 것은 비즈니스 잉글리시도 세계인으로서의 자각도 아니고 엄마 밥의 소중함이었다.
납작한 식판에 담긴 밥 위로 입김을 불었다. 후 하고 불자 설마 싶던 밥알들이 일제히 식판 위로 떠올랐다. '후, 후우.' 책상 위 지우개 똥을 털어내 버리듯 계속해서 불었다. 밥알이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오른다. 나풀나풀, 훨훨. 어디라도 닿을 듯 높이 날아갔다. 이왕이면 서울에 있는 우리 집까지 날아가면 좋을 텐데. 점점이 멀어지는 하얀 필리핀 밥알들을 바라보다가 잠에서 깼다.
아직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두운 새벽, 불길한 느낌의 곰팡이가 슬어있는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캐나다에 있었다.
캐나다에서 나는 필리핀 가족의 집에서 홈스테이(homestay)를 했다. 이탈리안 가족을 떠나 두 번째로 정착한 곳이었다. 길을 걷다 보면 발에 차이곤 하는 돌멩이처럼 흔하게 생긴 2층 목조 주택에 4인 가족이 살았다. 마흔을 조금 넘긴 싱글의 하숙집 주인과 그녀의 엄마, 그녀의 여동생 그리고 여동생의 남편까지. 각자 마트나 세탁소 등에서 일을 하는 캐나다의 전형적인 제3세계 주민이었다. 그들은 동남아시아인의 보편적인 얼굴과 빠듯하고 힘겨운 삶이라는 전형성으로 캐나다의 멜팅 포트(melting pot)를 구성하고 있었다.
영어를 공부하겠다는 막연하고도 순진한 계획으로 온 캐나다에서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배에서는 항상 바다 위를 끼룩거리며 날아다니는 갈매기 울음소리가 났고 뱃속은 입주민이 전원 퇴거한 재건축 아파트 단지처럼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침 어학원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맞은편 흑인 아줌마의 손에 들린 도넛을 보고 군침을 삼켰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나는 배고팠고 무엇보다 엄마의 밥에 굶주려 있었다.
필리피노(filifino)의 식사는 항상 간소했다. 날아갈 듯 가벼운 쌀과 주로 육류였던 메인 요리 1종, 짭짤한 야채 피클과 콘 샐러드가 전부였다. 하숙생뿐만 아니라 그들도 그렇게 먹었으니 차별은 아니었다. 하얀 플라스틱 식판에 덜어진 음식을 조용하게 묵묵히 먹는 것이 그들의 식사법이었다. 메인 요리로는 간장에 조린 닭이나 기름에 튀긴 닭이 올라왔다. 돼지고기는 양파와 콩과 함께 삶아졌고 동물에 대한 살생이 지나쳤다고 생각이 든 날이면 당면처럼 투명하고 누리끼리한 면이 무쳐져서 내어졌다.
하숙생의 저녁 식사는 그날 아침에 준비되어 식판에 담긴 채 냉장고로 들어갔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하숙생은 식판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려먹으면 됐다. 얼려졌다가 전자레인지에 녹여낸 밥은 가벼웠다. 필리피노 집주인은 종종 하숙생의 식판을 점검했다. 배가 너무 고파 몰래 밥통의 밥을 더덜어 놓으면 귀신같이 찾아내 식판에서 다시 덜어내곤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내가 보태놓은 만큼 다시 덜어냈다. 친절하고 잘 웃는 그들이었지만 밥에 대해선 아주 인색했다. 밥의 양에 대한 불문율이라도 있는지 내 밥은 항상 끼니를 겨우 때울 만큼에 고정되었다.
밥으로 채우지 못한 허기를 군것질거리로 때울 때면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큼지막한 공기에 밥그릇의 한계를 시험하듯 할 수 있는 한 꾹꾹 눌러 담고도 항상 "더 먹을 거지" 하고 물었다. '자식은 항상 배불리 먹여라'는 이 땅의 엄마들에게 부여된 숭고한 규율이었다. '밥공기에는 언제나 더 담을 공간이 있다.', '한 숟갈은 정 없다.'는 엄마의 엄마, 그리고 그 엄마를 통해 계승되어 온 사랑이 넘치는 실천 명령이었다.
동시에 엄마가 "더 먹을 거지"라고 물을 때마다 "내가 돼지인 줄 알아?"라고 투정을 부리며 슬쩍 밥그릇을 내미는 것은 이 땅의 아들, 딸들이 모정(母情)을 받아내는 클리셰이다. 나는 지금껏 엄마의 밥 때문에 살이 쪘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다.
필리핀 밥은 위태롭게 날아갈 듯 가벼웠다. 쌀이 정말 필리핀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필리피노가 지은 밥이니 필리핀 쌀이겠거니 한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쌀의 출처는 알 길이 없지만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에 훅 날아갈 것 같은 밥의 가벼움만은 기억에 생생하다. 필리핀 밥은 유약했고 밥알 사이의 공백이 너무 커서 먹어도 먹어도 항상 배가 고팠다. 필리핀 밥은 뱃속의 허기를 채워주지 못했다. 단지 끼니를 때울 수만 있을 뿐이었다. 길 위에서 퍼지지 않도록 미터기에 맞춰 채우는 화물차용 기름 같은 것이었다.
필리핀 밥의 가벼움은 필연적으로 엄마의 밥을 떠올리게 했다. 그들 밥의 대척점에 엄마의 밥이 있었다. 엄마가 지은 밥은 때때로 질고 가끔은 뜸이 덜 들어 되곤 했지만 언제나 꽉 차 있었다. 엄마의 밥은 밥알 사이가 멀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당겨서 맛을 구성했다. 그래서 반찬 따위 없어도 그 자체로 맛있었다.
엄마의 밥이 맛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밥에 담긴 목표 의식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밥을 지은 것은 자식의 허기를 채우는 것을 넘어 자식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엄마의 밥은 영양소로서 나를 살찌웠을 뿐만 아니라 사랑받고 있다는, 부모와 자식이 떼어질 수 없는 굳건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정신적 고양감을 충족시켜 주었다. 나는 밥알을 씹고 모정을 삼켰다. 나를 키운 것은 교육도 사회적 관계도 아니고 오로지 그녀의 밥이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11kg이 빠져 있었다. 홀쭉해진 볼을 안쓰럽게 부여잡았던 엄마의 눈빛을 아직 기억한다. 돌아오고서 나는 비워진 공백을 채우려는 듯 걸신들린 듯이 먹었다. 빠진 살보다 더욱 통통하게 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집으로 돌아가면 또 엄마의 밥이 나를 기다릴 것이다. 어른이 된 나는 여전히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엄마의 밥을 먹으며 살을 찌운다. 그 사실이 고마워서 나는 어쩔 줄 모르고 투덜대는 얼굴로 슬며시 밥공기를 내민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