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와트 입학 지원서

by 이냐니뇨

나는 전셋집을 내 돈으로 수리해서 살고 있다. 지난 기록을 돌아보니 수리하는 데 400만 원이 좀 안 되게 들었던 것 같다(내 인건비는 0원). 나도 안다. 내가 호구라는 거.


처음 계약을 할 땐 배고플 것 같다면서 따끈한 땅콩과자를 한 봉지 사들고 들어오는 주인 할머니의 인심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방 3개짜리 집에 여자 혼자 산다며 방 하나쯤은 세 주라고 흔쾌히 말씀하시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바로 특약에 넣었어야 했지만(당시에 몹시 고민했다.) 아무래도 회사에 소속된 몸이니 자유롭게 사업자를 낼 수 없는 형편이라 조금 고민한다는 것이 화근이었다. '안 되더라도 일단 했어야 하는 건데...'라고 생각해 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 집을 둘러본 뒤 가장 마음에 걸렸던 건 욕실이었다. 처음 집을 짓고 도기를 한 번도 바꾸지 않은 듯 본래의 색을 잃은 도기들. 분명 흰색이었을 텐데 이제는 오렌지색에 가까운 누런 색이 되어있었다. 그래 뭐, 낡고 누런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는데 욕조는 군데군데 벗겨져서 벗겨진 곳이 녹슬고 있었다. 욕조가 녹스는 소재로 만들어진다는 걸 이 집을 보고 처음 알게 됐다.


최악은 천장이었다. 망가진 지 오래된 듯 돌아가지 않는 낡은 환풍기가 붙어 있고 가장자리는 모두 벗겨지기 시작해 곰팡이와 먼지로 얼룩진 시트지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보기에도 당연히 좋지 않았지만 나는 유독 비위가 약해서 절대 그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욕실 천장만큼은 무조건 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도배와 장판도 안 해준다는 주인 할머니가 욕실 천장 수리를 해주겠다고 할 리는 만무했다(물어보긴 했지만 욕실은 멀쩡하다고 하셨다.)


처음 본 화장실의 모습. 심지어 변기는 금이 가있었다.



최근에 집을 구하려고 해 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전세 매물은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 내 예산에 맞는 전셋집은 더더욱 적다. 경제적인 이유로 빌라살이를 결심하고 나니 더더욱 후보군이 줄어들었는데, 관행적으로 했던 불법 증축이나 불법 구조물 설치로 인해 전세대출에 제한이 있는 건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사 시기와 조건이 모두 맞는 집이 그때 이 근방에는 딱 2집 있었다. 나에겐 조건을 좀 더 양보하느냐, 어느 정도 돈을 주고 이 집을 수리하느냐의 선택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던 게 주인 할머니의 면접 아닌 면접을 보고 이 집을 계약할지 조건을 수정할지를 정해보자, 하는 거였다. 그날 저렇게 인심 좋은 멘트를 하시면서 수리를 해주진 않겠지만 원한다면 필요한 만큼 직접 수리를 해도 좋다, 집도 넓은데 세를 주고 싶으면 주라는 조건을 내거신 것이다. 그 달콤한 유혹에 나는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는 남의 집을 내 돈 내고 열심히 고치기 시작했다. 세를 주는 것에는 구두로나마 공인 중개사 앞에서 허락을 받은 셈이니, 하나 남는 방은 게스트룸으로 꾸미고 가끔씩 단기 임대를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요즘 법이라면 나는 여기 최고 4년, 48개월을 살 수 있다. 반년 뒤 집을 다 꾸미고 손님을 받는다고 가정하더라도 한 달에 한 번 임대를 줘도 40번을 줄 수 있는 기간이니까. 1박에 10만 원 만 받아도 수리비는 뽕을 뽑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계산이었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집이 깔끔해지니 너무 좋다면서, 심지어는 고생해서 어떡하냐고 내 걱정까지 해주시던 주인 할머니는 갑자기 얼굴을 싹 바꾸셨다. 이사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대뜸 "혼자 사는 집 맞아? 혼자 사는데 왜 이렇게 넓은 집에 살려고 하고 집도 꾸미는 거야?"라며 몇 번이나 따져 묻기 시작하셨다. 심지어는 남의 집을 이렇게 수리하는 게 불법인 줄은 아냐면서 으름장을 놓았다(불법 아니다. 계약서 특약에도 넣은 내용이고 사전에 고지도 하고 부동산에도 상황을 공유하며 진행했다.)


하, 솔직히 말하자면 나 혼자 살기로 했더라도 이 집에 살기 위해서 이 정도 수리는 했을 것이다. 온전히 혼자 살기로 하고도 이 집을 골랐을지는 의문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진짜 억울하긴 했다. 단순히 여자 혼자 산다고 집이 넓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예쁘게 살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냐는 말이다.


억울한 마음 반, 더럽고 치사해서 안 하련다는 마음 반으로 나는 손님을 초대하려던 원대한 계획을 전면 백지화했다. 그냥 보란 듯이 혼자 살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이면 아주 예쁘게, 잘. 애초에 임대인의 동의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집 없고 힘없는 임차인이 뭐 어쩔 수 있나? 특약사항이라도 바로 넣지 않은 과거의 나를 원망할 뿐이었다.



고치고 눈에 띄게 밝고 깨끗해진 집.



다행인 건 고친 이 집이 제법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욕실 천장을 설치할 때 생각도 못한 이슈가 있어서 전보다 천장이 살짝 낮아졌는데, 그래도 고친 욕실이 훨씬 넓게 보인다. 정신 승리를 조금 보태서 생각해 보자면, 기왕 이렇게 된 거 도기까지 교체한 덕에 괜히 남이 쓰던 지저분하고 곰팡이 핀 세면대나 금 간 변기를 쓰지 않아도 되니 이 얼마나 개운한 일인가?


난 짧은 출퇴근 시간을 위해 동네 친구라곤 하나도 없는, 오히려 가장 친했던 친구와는 1시간 넘는 거리로 떨어져 살게 되어 조금은 쓸쓸한 동네로 이사를 왔다. 혼자 살면서 동네 친구까지 잃으니 아무리 늘 바쁘게 지내는 나여도 허전하고 외로운 순간이 전보단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집안 구석구석 내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집이라, 집에 애착이 생겼다. 그 덕에 좀 더 쉽게 정을 붙이고 하나하나 보듬어 가며 살고 있는 것 같다. 마감이 조금 부족한 곳들은 그 부족함이 결국은 내 탓이니 귀엽게 여기면서.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는 터라 뭘 해도 돈이 필요하고,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것들은 그 가치를 단순히 수치로만 따지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달콤한 밀크티는 숫자로만 봤을 땐 내 혈당을 높이고 칼로리가 높은 해로운 것이겠지만, 피곤한 오후 그 한 모금이 주는 행복감이 내 마음에게는 오히려 치료약이 되는 것처럼.


어느덧 이사 온 지 7개월이 다 되어 간다. 그 사이 나는 그 전의 집보다 지금 고쳐진 상태의 이 모습이 익숙해졌다. 이 집을 고치지 않았다면 내 통장 잔고의 숫자는 지금보다 높았겠지만 매일 문을 열면서 어딘가가 눈에 거슬렸을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가는 욕실을 보며 나는 얼마나 더 한숨을 쉬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내가 호구가 아닌 것이라고 하진 않겠지만, 가성비는 나쁜 이 집에서 가심비 넘치게 살고 있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호구와트 입학 지원서가 승인되었습니다.)



#뚝딱대는구옥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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