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든 삶을 구원하는 '욕 한마디'의 미학
한동안 '원영적 사고(럭키비키)'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그 시작엔 아이브의 멤버 장원영이 있고, '럭키 비키'는 걸그룹 아이브 멤버 장원영의 영어 이름인 '비키(Vicky)'와 행운을 뜻하는 '럭키(Lucky)'를 합친 말이다. 어떤 난관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는 태도 덕분에 ‘원영적 사고(럭키비키)’라는 말이 마치 현대인의 필수 지침처럼 프로그램 곳곳에서 들려왔다. 자신만의 삶의 철학을 세운 태도는 아이돌을 잘 모르는 나조차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할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어느 그룹에나 꼭 그런 사람이 있다. 처음엔 인상이 흐릿하거나 역할이 모호해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잡음 없이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 에픽하이의 음악은 좋아했지만, 사실 예능 속 투컷을 볼 때면 날카로운 인상에 '저 사람은 팀에서 정확히 무엇을 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곤 했다. 그러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그의 일화들을 접하며 나는 그에게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회사에 출근해 모니터를 켠 투컷은 가장 먼저 굵직한 한마디를 내뱉는단다.
“아, 존나 하기 싫어.”
그러다 정말 일이 하기 싫어질 때면 강도를 높여 외친다.
“아, 씨발 진짜 존나 하기 싫어!”
반전은 그 냉소적인 투덜거림 끝에 누구보다 빠르게 그날의 할당량을 해치우고 퇴근해 버린다는 점이다. 억지로 행복을 연기하며 '오히려 좋아'를 외치기보다, 하기 싫은 마음을 시원하게 인정해 버리고 자기 몫을 다하는 그 '성실한 냉소주의'야말로 유쾌한 생존 방식이라고 생각하는건 나뿐만은 아닐것이다. 긍정으로 포장하기엔 너무도 수북한 일더미앞에서, 투컷처럼 시원하게 외치는 욕설 한마디가 풍기는 그 '비릿한 생활감'이야말로 숨 막히는 답답함을 웃음으로 승화시켜버리고야 마는 신의 한 수다.
기안84 역시 처음엔 내게 당혹스러운 존재였다. <나 혼자산다>에서 보여준 그의 기행들을 보며 ‘일부러 저러나?’ 싶어 미간을 찌푸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행동을 멈추질 않는 거다. 일상생활에선 배달음식을 시켜서 바로 먹는 게 아니라 냉공고에 묵혀뒀다가 녹여서 볶음밥을 해 먹는가 하면,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에서는 장례가 치뤄지는 강가의 한편에서 갠지스강물을 입에 떠넣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어느날 경악스러운 그의 행동이 설득이 되기 시작했다. 갠지스강물을 마신 이유는 물이 더러워서 탈이 날지도 모른다는 염려보다 신성함을 상징하는 그들의 어머니강을 더러운 물 취급하지 않는 그의 배려가 앞선 행동이었다. 그의 행동엔 누가 어떻게 볼지에 대한 계산이 없고, 진심만 있었다.
어느덧 그가 나오는 프로그램은 다 챙겨보는 팬이 되었고 최근에는 극한84에서 그가 마라톤 하는 과정을 보며 응원 중이다. 함께 달리기를 하는 '강남'이 다리가 너무 아픈 와중에도 아내 '이상화'를 떠올리며 고통을 참아내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화면을 보며 기안은 말한다.
'와, 나는 하나밖에 생각 안 하며 뛰었는데'
뭘 떠올렸냐는 패널들의 물음에 기안은 꾸밈없는 표정으로 '쒸발'만을 떠올리고 외치며 끝까지 달렸다고 답한다.
기안이 달리기를 시작하며 전 국민들 사이에 러닝 열풍이 분 것만 보아도 그의 투박한 욕설과 어설픈 행동에는 묘하지만 강력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력이 있다.
적당히 찌든 어른인 나는 굳이 이름 붙이자면 ‘기안다운 행동’, 그리고 ‘투컷적 사고’에서 비루한 현실을 구원하는 묘한 쾌감을 느낀다. 마라톤 같은 인생의 고비마다 욕 한 사발 들이키고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기안과 투컷의 솔직함은 나에게 장원영의 럭키비키보다 더 큰 위안을 준다. 억지로 웃으며 긍정의 기운을 끌어올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혼자만 들리게 욕 한마디 시원하게 내뱉고, 누구보다 빠르게 싫은 일을 시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유용하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