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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Jul 15. 2023

숙취는 역시 요가로 풀어야지

삿구루하타요가 15일차

아침에 눈뜨자마자 머리가 너무 멍했다. 어제 마신 와인 때문이다. 와인 한 병이었을 뿐인데 나는 완전히 취했다. 다행히 술을 마시면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있어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깼다. 1리터에 가까운 물을 잔뜩 들이 마시고 콜드 샤워를 했다. 이러고 있는 내가 너무 웃겨서 나갈 준비를 하는 내내 낄낄 웃어댔다. 머리는 멍하지만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선생님께 오늘은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 양심은 있으니까 숙취 때문이라고 말하진 않았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계속 걱정해 주셔서 사실 부끄럽긴 했다. 물론, 요가를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수련에 지장을 준다는 게 문제일 뿐이지.


머리가 멍하니까 되려 마음이 편해졌다. 어제와 달리 비교고 뭐고 그런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나는 멍했고, 비워져 있었다. 덕분에 몸의 목소리도 더 잘 듣게 되었다. 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몸뚱이인지라 딱 '할 수 있는 만큼'만 했다. 어제 무리를 했던 탓인지 햄스트링도 당기고 아팠다.


욕심이 사라졌다. 어제의 몸과 나를 비교하지도 않았다. 덜 하겠다는 생각은 나를 단 한 번도 데려가지 못했던 곳으로 이끌었다. 모든 자세를 최대한으로 끝까지 해내던 나는 적당히가 없다. 적당한 곳에서 멈추면 어떤 느낌인지 알 수가 없다. 일단 그곳이 마음에 안 드니까 뭔가를 느끼려고 하지도 않는다. 느껴지지가 않는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


오늘은 유난히 발가락 스쿼트 자세가 많았다. 다양하게 중심을 잡으면서 한쪽 다리를 들었다가 팔로만 지탱했다가를 반복했다.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수리야크리야와 수리야샥티까지 하니 온몸에 열감이 훅 올라왔다. 기분이 좋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술 마신 다음 날에 사우나를 가는 건가. 온몸에 따뜻한 열감이 퍼지는 게 에너지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에너지는 분명 좋아졌지만 그렇다고 숙취가 사라진 건 아니다. 앉아서 멍하니 쉬었다. 수영장 물이 하늘하늘거렸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결이 클럽 조명처럼 잔잔히 천장에 퍼졌다. 이런 날엔 따뜻한 국물을 먹어야지. 요가원에서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쌀국수 맛집에 갔다. 고추까지 탈탈 털어 칼칼해진 소고기 육수를 들이켰다. 다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이 맛에 술 마시고, 이 맛에 요가를 하는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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