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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Sep 03. 2021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엘리스 달튼 브라운 전시회


아주 오랫동안 '진선미'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리와 선함이 절대 가치인 건 알겠어. 그런데 거기에 왜 아름다움이 낀 거지? '미'가 진, 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중요하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흔이 넘어서 나 자신을 돌보기 시작한 이후 아름다움의 가치를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숲길을 산책하면서 보는 파릇한 식물들, 큰맘 먹고 평일 낮 연차를 내고 간 전시회의 그림들, 예쁜 그릇들로 꾸민 식탁...


나를 회복시키고, 삶을 충만하게 하는 것들은 진리도 선함도 아닌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움을 충분히 누리고 난 다음에야 세상의 진리와 타인에 대한 선함을 추구할 에너지가 생겼다. 게다가 아름다움에는, 취향 차이는 있을지언정 찬반론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것이 내게 평안을 주었다.


그때부터 삶의 미학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에 또 하나를 발견했다.



엘리스 달튼 브라운.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지인이 할인 쿠폰을 단톡방에 올려주지 않았더라면 일부러 갈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시회장 문을 열고 들어가서 첫 번째 작품을 보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캔버스 위를 가득 채운 것은 형태도, 색도 아니라 빛이었다. 사각 프레임 바깥 어딘가에 있을 태양의 존재가 느껴졌다. 쏟아지는 햇살은 세상을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장면들이었다.


누가 나처럼 이렇게 햇살을 좋아한단 말인가? 신기했다. 그리고 햇살을 캔버스 위로 생생하게 잡아두는 그 능력에 감탄했다. 그녀가 잡아둔 빛은 내 마음속 깊은 곳을 비추며 크고 작은 일렁임들을 만들어내었다. 나는 직감했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녀의 대표작인 바람 시리즈도 좋았지만, 그 전작들인 집 시리즈도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언제나 여름은 내게 서툰 연애를 생각나게 했다. "덥다, 더워." 하며 잔뜩 불평을 늘어놓다가도 막상 팔을 스쳐가는 바람의 온도가 낮아지면서부터 조금씩 서글픈 기분에 젖어들다가, 이윽고 두터운 외투를 걸쳐야 하는 계절이 찾아오면 '그때는 몰랐지만 사실은 널 많이 좋아했어' 같은 구 남친적 느낌이 들곤 했다.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으면 좀 더 솔직해질 걸. 그리고는 긴 겨울 내내 수족냉증에 시달리며 봄이, 그리고 다시 여름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녀의 그림에서, 어딘지도 모를 이국땅의 낯선 집 담벼락에 비치는 햇살의 존재를 느끼자마자 나는 '저런 빛을 볼 수 있다면 겨울도 그렇게 힘든 것만은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매서운 추위가 코 끝을 시리게 할 때마다 이 빛을 떠올리면, 외투 자락처럼 단단하게 여며진 마음도 조금은 헤실하게 풀어질 수 있을 거라는 것도. 예술이란 이렇게 위대한 것이다.


내가 본 겨울 햇살 그림은 아니지만, 빛이 예뻐서 (도록을) 찰칵!


* 제목을 짓고 나서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인데...' 해서 찾아보니 현경 님의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라는 에세이가 있었네. 저 에세이 제목 처음 들었을 때에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는데 지금은 완전 동감한다(다만 책 내용을 읽어보지는 않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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